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 2011) / 차용국

이정현 | 기사입력 2020/05/17 [22:50]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 2011) / 차용국

이정현 | 입력 : 2020/05/17 [22:50]

 

▲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 2011)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십여 년 전 문화인류학을 처음 만났을 때, 낯설고 당황스러웠던 기억들이 빨간 밑줄처럼 생생합니다. 무엇보다도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일반적으로 문화인류학은 세계 여러 민족의 문화를 비교연구함으로써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규명하는 학문(7)이라고 하는데, 그 범위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어서 고유의 특성이나 동일성을 찾기가 어렵기만 했습니다. 법학적 사고와 행정 경험으로 다져진 내 인식은 무엇이든 분명하고 실효적인 것에 익숙해 있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돌아보니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세월도, 세상도, 그리고 문화인류학에 대한 나의 생각도.

 

문화인류학만의 독특한 연구방법이 있는데 바로 현지조사입니다. 현지조사란 자신이 연구하려는 다른 문화 집단에 가서, 적어도 일 년 이상 그곳의 주민들과 같이 거주하면서 참여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자료를 수집(7)하는 연구방법을 말합니다. 인류학자들이 다른 문화를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다른 문화를 통해 자기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26). 현지조사는 현지인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 직접 경험하고 수집한 연구 자료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현지조사는 낯선 세계와의 만남일 뿐만 아니라 인류학적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지조사 논문이나 민족지 서적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문화의 번역'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16)고 하겠습니다.

 

어떤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그 문화가 생겨난 특수한 사회적 상황이나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그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27). 다시 말하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형성된 기준이나 가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의 생활에 녹아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일이 우선해야 한다는 함의입니다. 실제로 각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그 문화가 지향하는 가치, 행동 패턴에 부합하는 인성을 특별히 강화하여 내면화하게 됩니다. 즉 한 문화에 속한 구성원들은 그 문화의 패턴이 보편화시킨 인격적 특징을 갖게 됩니다(82). 문화와 인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각 문화집단의 인성적 특징이 유전이나 혈통 같은 인종적종족적 유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이 공통으로 경험한 역사와 각 개인이 어릴 때부터 체험한 양육 및 교육 방식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각자가 태어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체험을 통해 형성되고 학습을 통해 재생산된다(82)는 뜻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마다 다른 가치관과 규범의 차이는 각기 다른 자연환경, 사회적 조건 그리고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문화 나름의 총체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83)고 합니다. 이를 '문화상대주의'라고 합니다.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세계 여러 문화를 우리 자신의 가치관이나 우열의 척도를 가지고 보지 않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8). 문화상대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현대인들에게 특히 강조되어야 할 개념이며(8), 다문화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모리스 프렐리치루이스 코저가 19577월부터 1년간 카리브 해안 지역의 아나마트(Anamat) 마을에서 수행한 현지조사에 따르면, 아나마트 흑인 농민들의 성생활에 나타난 성의 권력관계를 보여줍니다. 성경험이 남자다움(남성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명성 게임'과 성경험이 은폐되어야 여자다움(여성성)이 높아지는 여성들의 '비밀 게임'은 성경험이 남녀에 따라 얼마나 다른 경험인지를 말해줍니다(110). 이와 같이 성은 남녀 간의 생물학적 욕망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불평등한 권력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109)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존 반 윌리건V.C.찬나의 ''지참금 때문에 죽는 인도 여성''에서는 '남성이 우월하다'는 문화적으로 뿌리 깊은 관념이 당연한 관습으로 전해오면서, 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28).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다양한 사회적 기제들이 때로는 관습이나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특정 사회의 본질적인 문화의 특성으로 간주되고 당연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평등은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개인에 의해 경험됨으로써 문화의 주요 부분이 되었고, 그 결과 같은 문화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권력 차와 그에 따른 폭력이나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자연스럽게 수용될 때가 많다(128)는 점을 시사합니다.

 

멜라네시아에서는 경제적 부, 후한 인심, 용기 등을 과시하여 정치적 권위를 획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빅맨(Big Man, 대인)'이라 부릅니다(206). 빅맨은 자신과 가까운 친지의 재산과 노력봉사를 '정치적 자본'으로 활용하여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는 등 '관대하다'는 명성을 누리게 됨으로써 정치적 지도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도움을 줌으로써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새로운 추종자들의 재산과 노력을 활용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또다시 추종자를 확보합니다(207). 마셜 살린즈의 ''빅맨과 추장''이란 글에서 보여주는 위와 같은 빅맨의 기본적인 행동방식의 구조는 단지 미개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현대 사회의 정치경제 등 다양한 분야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의 사소한 변화가 모여 온 사회 사람들의 생활문화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어느 사이엔가 그 지역의 자연환경은 물론 지구적 생태균형까지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바뀐 자연환경은 다시 우리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즉 환경문제는 문화의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도 바로 생산과 소비 패턴의 재구성을 통해 생태적으로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 달려 있다(337)는 점입니다. 재러드 다이아먼드의 ''이스트 섬의 몰락''에서는 최근의 고고학 발굴로 드러난 사실을 통해 1,500여 년 전 최초로 이스트 섬에 찾아 들어간 사람들이 그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빠르게 번성하고, 고도로 조직적인 문명을 만들어냈으나, 그 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자연환경을 훼손하여, 결국 문명 자체를 파괴했고 최소한의 식량조차 마련할 수 없게 되자 식인까지 하게 되는 자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337)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득권 세력인 정치경제 지도자들과 그들을 선출한 사람들은 거대한 변화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러한 상황을 고쳐보려는 시도를 오히려 방해하기도 합니다(349). 자기 부족의 우월적 부와 힘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더 크고 화려한 모아이 석상 세우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스트 섬 지도자들의 허영과 만용의 결과는 파괴와 몰락이었던 것처럼

 

종래의 문화인류학 연구는 주로 원시부족이나 비문명화된 비서구 사회 또는 소외된 집단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현지조사에서 얻을 수 있는 해석도 대부분 그들이 왜 문명의 발전에서 지체되었고, 힘없고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에 관한 대답입니다. 자칫 그 이유와 책임이 하층부의 문제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함의입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이끌기도 하고, 가로막기도 하는 집단은 상층부입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 엘리트의 생각과 행동이 수많은 사람의 삶과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상층부 연구(Studying Up)'가 비어 있다면 그 연구에 대한 해석의 신뢰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문화인류학의 수요이며 숙제입니다.

 

숙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학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연구로의 전환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들은 생소하고 낯선 곳에 가서 고생을 해봐야 하고, 이러한 시련이 있어야만 훌륭한 인류학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아직도 매우 강하다(391)는 점입니다. 또한 연구 대상자에 대한 접근성(access), 연구 윤리(ethics) 및 방법론(methodology)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접근성 문제는, 상층부는 연구대상이 되길 원치 않으며, 한 군대 모여 살지도 않고, 사실상 만나기도 어렵기 때문에 연구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391)는 점입니다. 윤리성 문제는, 연구자가 자신이 상층부 연구자라는 신분을 속이지 않고는 원하는 정보나 자료를 얻을 수 없다(392)는 것입니다. 방법론적 한계는, 인류학의 전통적 방법인 참여관찰은 비교적 소규모의 조사지역 내에서 연구자가 주민과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방식(393)이기 때문에 상층부 연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가야만 할 길이라면, 장애물도 극복해야 할 일입니다. 인류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지금도 유전하고 있듯이. 인류는 한 발로 걸어온 것이 아니기에.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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