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그 신비로운 비밀의 문을 열다

차용국 | 기사입력 2021/05/17 [21:45]

기억, 그 신비로운 비밀의 문을 열다

차용국 | 입력 : 2021/05/17 [21:45]

차용국 시인문학평론가

 

기억, 그 신비로운 비밀의 문을 열다

* <기억>, 김윤환, KBS 기억 제작팀 지음, 2011

 

 

 

기억은 우리의 뇌가 정보를 받아들여 저장하고 인출하는 기능이며, 추억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일이다. 우리의 뇌는 매일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활동을 계속한다. 하지만 정작 뇌의 주인인 우리는 기억과 추억의 메카니즘을 잘 모른다. 그래서 기억과 추억은 여전히 신비롭고 궁금한 미지의 나라다. 그 비밀의 문을 열어본다. 마침 KBS에서 60분짜리 3부작으로 제작한 사이언스 대기획 인간탐구 프로그램 <기억>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사람의 뇌와 기억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사람에게 행복한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데 훌륭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도 이 프로그램과 책의 내용을 병행하여 보고 읽으며 썼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할 수 없고, 추억할 수 없으며, 삶의 어느 시공간에서 누구와 어떤 인연의 매듭으로 연결된 삶을 살았는지 기억할 수 없다면, 삶의 의미나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에 기억이 없으면 생리적 본능만 남기 때문이다. 기억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의 가치를 선사하는 고차원의 본능이다. 인류는 진화를 통하여 기억을 만들어냈다. 진화의 본질은 생존원리다. 생존에 유리한 것을 취하는 단순한 원리다. 기억이 진화의 산물이란 말은 생존에 유리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인간은 매일매일 접한 정보 중에서 생존에 유리한 것만 취하여 앞쪽 뇌, 즉 전두엽에 모아 놓고 끊임없이 가공한다. 딘순히 과거의 정보를 빼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상상력을 더하여 미래의 기억을 생산한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원점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고 위로 발돋움할 수 있게 도와준다''라고 하였다(17). 이 말은 기억의 미래 지향성을 강조하는 언술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사실 기억이 과거형으로만 성립한다면 큰 관심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다니엘 색터 교수는 ''인간에겐 미래를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이 중요한 일상인데 기억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과거의 일들을 기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17).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김윤환 PD''기억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가 있어야 미래가 있고, 상상과 창조는 과거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은 중요하다(17)''고 한다. 기억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됨으로써 기억은 완전해지며, 그 기억은 ''를 존재감 있는 자아로 만든다(27)는 점이다. 인간만이 상상하고, 창조하고, 자아 존재감을 성취할 수 있다. 기억 덕분이다.

 

기억은 뇌의 활동이다. 기억은 오감을 통해 받은 외부의 자극이 해마를 통해 전기신호로 바뀌어 대뇌피질에 저장된다. 해마는 외부로부터 받은 신호를 정리하고 일시적으로 기억을 저장하는 작용을 담당하는데, 그 저장기간은 1개월에서 몇 개월 정도밖에 안 된다. 그 다음 기억은 측두엽을 포함한 대뇌피질로 옮겨간다(40). 대뇌피질은 기억의 최종 저장소다. 그래서 대뇌피질의 신경 회로에 신호가 전달되면 기억이 재생된다(43). 인간의 뇌는 약 1,300그램 정도다. 체중의 2퍼센트 정도지만, 전체 에너지의 1/4 정도를 사용한다. 우뇌와 좌뇌 사이 안쪽에 기억과 감정을 다스리는 변연계가 위치한다. 이는 시상과 대뇌반구를 연결해 주는 중간 역할인데, 변연계의 가장 중요한 중추는 해마이다(45). 기억은 해마로부터 시작된다. 자세히 살펴보자.

 

해마는 1cm 정도의 지름에 5cm 정도의 길이이며 수많은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다(46). 뉴런은 신경계의 기본 세포 단위다. 신경 세포체와 신경돌기로 구성된다. 신경돌기는 신호를 전달하는 축삭돌기와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상돌기로 나누어진다. 축삭돌기와 수상돌기 사이에 신경접합부(신호 연결 지점)인 시냅스가 있다. 뉴런의 활동은 시냅스를 건너온 신호가 많을 때 왕성하다. 기억상실증(amnesia)은 사고에 의한 두부외상, 정신질환, 히스테리 증상 등으로 인한 의식장애 뒤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현 시점으로부터 과거의 일정 기간이나 특정한 사실의 기억이 재생되지 않는 상태다. 기억상실은 기억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총체적 기억상실'과 기억상실이 부분적일 때 나타나는 '부분적 기억상실'로 구분된다. 부분적 기억상실은 과거 시기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장기 기억상실과 불과 몇 초나 몇 분 전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로 나뉜다. 또한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새로운 일을 기억 못하는 '전향 기억상실(anterograde amnesia)'과 드라마 <겨울연가>의 주인공처럼 과거의 일을 기억 못하는 '후향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이 있다(47). 어떤 것이든 기억을 잃는 것은 삶이 송두리체 잘려나간 것과 같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추억을 잃어버린 삶만 남는 것과 같다.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 그것을 사람들은 추억이라 부른다. 지식은 다시 배울 수 있지만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은 다시 배울 수 없다(49). 추억 없는 삶은 황량하다. 기억할 수도 다시 배울수도 없기에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기억은 불완전하다(52). 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장면과 상황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갖는다. 보통 우리는 주변에서 수많은 소리가 들려도 자신의 이름처럼 본인과 관련되었거나 관심 있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와 같이 특정 소리에 반응하는 현상을 '칵테일 파티 현상'이라고 한다(54).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김민식 교수는 ''우리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정보만을 선택해서 저장한다''고 말한다(55). 그러니까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기억은 기억을 꺼낼 때마다 계속 바뀐다. 기억은 나만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매번 다르게 해석할 뿐이다(56). 기억을 사실로 믿지 마라. 사람의 기억은 각자의 변화맹과 선택맹이 작용한 결과이다. 변화맹이란 주변의 환경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지칭한다. 선택맹이란 자신이 선택한 대로 결과를 얻지 못해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56). 변화맹과 선택맹의 작용이 우리 각자를 타인과 구별되는 기억을 갖게 한다. 그래서 기억은 나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다시 뇌 과학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뇌에서 기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시냅스이다. 시냅스란 한 뉴런에서 다른 세포로 신호를 전달하는 연결 지점을 지칭한다(59). 뇌 안에 있는 수십 조의 시냅스는 훈련된 정보 습득정보 출력을 통해 상황에 맞는 학습 활동을 하며 이를 통해 문제 해결 능력을 결정한다(60). 시냅스는 신경 세포를 연결하여 신경 회로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생후 8개월 무렵은 '뇌의 빅뱅기'라 말할 정도로 아기 뇌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다(64). 인간의 뇌가 평생 쓰게 될 신경 회로는 인간의 뇌에 있어서 결정적 시기라 할 수 있는 생후 8개월에서 36개월 사이에 완성된다(65). 뇌와 관련해서 중요한 개념이 '뇌의 가소성(plasticity)이다. 대체로 만 3세 전후로 아기의 뇌 구조는 결정되지만, 인간의 뇌는 이후에도 사용 여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얘기다(67). 나이가 들어서도 뇌는 새로운 외부자극과 경험을 접하게 되고, 그것을 반복해서 숙달하게 되면 시냅스가 연결된다. 뇌의 가소성은 인간 뇌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다(67). 물론 이러한 뇌 과학이 사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뇌 과학은 여전히 미지의 세상일 뿐이다. 다만 위와 같이 뇌 과학이 보여주는 이면에는 나이가 들어도 신체의 노화처럼 뇌의 능력이 감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최초에 입력했던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지식이나 경험, 신념 또는 다른 선입견에 의해 재구성한다(68). 심지어 기억의 재구성에는 가짜 기억(허위 기억)의 생성도 가능하다. 가짜 기억은 인간의 뇌인 전두엽이 주인을 감쪽같이 속이는 것(69)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위 기억 심리실험을 학계에 처음 소개한 로푸터스(Elizabeth F. Loftus) 교수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상상력을 통해 기억처럼 느껴지는 것을 구성할 수 있다(70). 즉 상상력의 근원은 기억이지만, 그 상상력으로 기억은 다시 만들어진다. 창조의 대지는 이렇게 개척되고 확장한다.

 

뇌 과학의 오묘함은 우리의 뇌에 진화의 신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진화는 생존과 유전의 결과이다. 인간의 뇌는 생존에 위협을 느낄 때 뇌의 변연계에 있는 편도체(amygdala)에서 가장 먼저 변화가 일어난다. 편도체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경우 가장 먼저 반응하는 곳이다(71). 편도체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수십만 년 전부터 터득해 유전한 생존 기제이다. 공포는 위협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73). 공포 상황은 인체의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먼저 공포에 직면하면 심장박동이 빠르게 증가한다. 이는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의 작용으로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장기조직이나 근육조직으로 쏠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75). 우리 몸이 공포를 느끼게 되면 신경계는 이를 빠르게 감지하고 쾌락을 느끼게 만드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Dopamine)을 분비한다(76). 그래서 공포와 쾌감은 동시에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본능적 방어 행위다. 인간은 시각적인 장면에서보다 청각적인 소리에 더 큰 공포감을 느낀다(77).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은 '공포조건화(78)'라고 할 수 있다. 편도체는 원인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대뇌와 따로 작동한다. 우리의 의지로 공포감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포감은 필요에 의해 뇌가 만들어낸 것이고, 오랜 기간 뇌 속에 남아 우리의 정서와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80). 생존을 위해 기억은 공포에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81). 공포를 느끼면 느낄수록 편도체는 그 상황이 생존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고, 선명하게 기억하려는 시스템을 가동한다. 큰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 사고를 겪은 후에도 쉽게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81). 결국 우리의 성격이라는 것도 뇌의 작용, 즉 기억의 표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의 기억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그 비밀은 바로 인간의 앞쪽 뇌 전두엽에 있다. 이곳은 모든 정보를 모아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령탑과 같은 곳으로, 이곳을 통해 인간의 기억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상상을 할 수 있다(85).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의미 있게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기억은 더 이상 '기억'이 아니다(87). 많은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가지고 있지 않지만,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미래의 자산도 소중한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놀라운 기억력은 바로 이 순간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아주 특별하지 않은 능력일 수도 있다(89). 숙달된 기억력은 더 이상 천재의 독점적인 능력이나 비범함으로 간주되지 않는다(89). 기억력은 지능 발달과 관계가 있을까? 지능 발달 지수를 나타내는 IQ(Intelligence Quotient)의 좋고 나쁨은 기억력과 관계가 있을까? 사실 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가 창안한 지능검사의 목적은 학습능력이 부족한 아동을 구분해내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지능지수와 유전적 요인과의 관련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후 미 육군이 개발한 스탠퍼드-비네 방식을 응용하여 개발한 필기식 집단 지능검사 방법이 오늘날 지능검사의 원형으로 확립되었다. 즉 검사 요소인 4부문(언어능력, 수리력, 추리력, 공간지각력)의 수치결과에 대한 한계성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지능은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선 가능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다. 최근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연구팀은 기억상실증 환자가 자신이 체험한 기억을 잊어버리더라도 그 기억을 축적하는 동안 느꼈던 감정은 그대로 유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110). 기억상실증 환자들은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간직했다(110). 치매 환자는 누가 자신을 돌봐주었는지조차 기억하거나 알 수 없다. 치매 환자들의 기억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살핌을 받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기억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이가 유일하게 간직할 수 있는 기억의 종류이다(111). 치매 환자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을 만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밝게 웃으며 자신의 느낌을 나타낸다(111).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이 기억을 저장할 수 있었던 시절에 가졌던 강열한 기억과 또 그 기억을 만들 때 느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오면, 바다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111).

위와 같이 기억과 감정과의 친밀성 관계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단서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성과 지성의 뒷전으로 밀려난 감성의 가치에 대하여.

 

기억은 오래된 미래다(112). 상상은 미래를 바라보는 또 다른 얼굴이다. 하버드대학교 다니엘 색터(Daniel L. Schacter) 교수는 2006<신경심리학회지>에 놀라운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동일한 주제를 주었을 때 과거를 회상하는 뇌 부위와 미래를 상상하는 부위가 놀랄 만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과거가 있어야 미래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다니엘 색터 교수에 따르면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상상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공통된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 일단 뇌 뒤쪽 시각 영역과 함께 왼쪽 해마가 활성화 된다. 그리고 좌내측 전전두엽, 두정엽이 공통적으로 활성화되었는데, 모두 자서전적 기억(미래 기억 포함)을 떠올릴 때 활성화되는 곳이다(115).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롤은 과거로만 갈 수 있는 건 '변변찮은 기억'이라고 했다. 즉 앞으로 미래로 가야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117). 미래 기억은 자신이 그 일을 마치면 과연 어떻게 될지, 1, 2년 전에 그걸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일을 마침내 다 끝내면 과연 어떻게 될지 미리 상상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통해 미래로 갈 수 있게 한다(117). 미래 기억의 중요성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미래 기억이 인간에게만 가능한, 독특한 특징인 이유는 훨씬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미래 기억의 가치는 자신의 미래를 미리 내다보면서, 그것을 현재와 연결하고 의미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를 활용하는 것이다. 과거의 소망에 대한 기억이 현재 자신의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18). 그것이 자신의 미래가 된다. 결국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간절한 소망과 수고가 그려낸 기억의 수채화다.

 

미래 기억은 뇌의 전두엽에서 담당한다. 전두엽은 뇌에서 가장 발달한 부분 중 하나다. 인간만큼 전두엽이 발달한 동물은 없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추론하고, 현재에서 미래로, 또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그걸 전부 미래 기억과 연결시키는 데 전두엽을 활용한다(118). 기억은 창조와 상상을 위해 존재한다(119).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는 기억을 통해 작품을 생난해내는데, 그 작업은 마치 플로리스트와도 같다고 말한다. ''플로리스트는 꽃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꽃을 선택하여 함께 묶어줄 뿐이다. 그렇게 이전의 꽃에서 전혀 다른 색, 다른 모습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꽃이 재탄생한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작품도 이전의 기억들을 이리저리 모아 특별한 방식으로 엮는 작업일 뿐이다. 창조라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선별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엮는 것을 의미한다(120).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상상력만으로 창조가 탄생하는 경우는 없다. 창조는 기존의 있는 동종 또는 이종의 사물과 생각을 엮어 새로운 것을 탄생해 내는 것이다. 상상력이 파도치는 역동적인 기억의 바다에서.

 

인간의 기억에는 진화론적 생존원리가 숨어 있다.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할 수는 없기에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바꾸어 착각하며 산다. 이 미스터리한 기억 시스템은 뇌의 네트워크 연결 구조를 통해 상상력과 창조력이라는 능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이로써 인간은 미래를 그리고 계획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121).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월드사이언스 포럼 2008 서울' 특별강연에서 ''인간의 뇌와 로봇의 인공지능을 구분해주는 것은 감정적인 측면이다. 인간이 컴퓨터 등 기계와 가장 많이 다른 점은 유머와 사랑, 예술 행위에 있다. 컴퓨터는 분명히 계산 기능, 기억 용량에 있어서 인간보다 훨씬 우월하지만 인간에게는 의식이 존재한다. 의식은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한 영역인 동시에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영역이다. 인간의 뇌는 의식을 우주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각자 좋아하는 분야를 하나씩 찾아 매일 규칙적으로 그 일을 하고, 그 지평을 조금씩 넓히다 보면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122)''이라고 한다. 디지털 문명의 문을 넘어 인류의 미래가 살 세상에서 인간에게 과연 중요한 자산이 무엇인지 숙고하게 한다. 초연결, 초융합, 인공지능화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기억의 가장 큰 적은 치매와 스트레스다. 알츠하이머, 치매로 불리는 이 병은 플라크(plaque)와 탱글(tangle)이 뇌세포를 공격해서 발생하는 질환이다. 알츠하이머 질환은 뇌에서도 특히 기억의 저장고라 불리는 해마를 가장 먼저 공격한다. 그래서 치매에 걸린 사람 대부분이 단기 기억을 잃게 된다. 그것이 점점 뇌 전체로 퍼져 감정 조절을 못하고, 결국 오래된 기억마저 사라지게 만든다(127).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가 손상되면 기억 장애가 일어나고, 특히 새로운 사실을 학습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외측 측두엽으로 확산되어 베르니케 영역(wernicke area)이 손상되면 언어 이해능력이 떨어지고, 급기야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과의 기억과 추억마저 하나둘씩 잊게 된다. 곧이어 두정엽의 퇴행이 시작되면 집을 찾는 일조차 힘들어지고, 왼쪽 두정엽이 파괴되면 동작 지식이 손상되는 실행증(apraxia)이 나타난다(130). 치매와 건망증은 원인부터 다르다. 건망증은 본인이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량이 과도할 때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일할 때 일시적으로 기억력 출력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140). 건망증은 뇌 훈련 등 본인의 노력과 의학의 도움으로 호전될 수 있다. 그러나 치매는 뇌세포의 본질적인 문제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완치하기가 현대 의학으로는 힘들다(141). 또한 우리의 뇌는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신장 위쪽에 있는 부신(adrenal gland)에 신호를 보내 코티졸(cortisol)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낸다. 코티졸은 주로 면역계통 분야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코티졸은 흥분 상태가 되면 분비되지만 다시 안정을 취하면 그 양은 줄어들게 된다. 반대로 우리 몸이 무기력증을 느낄 때는 적당량이 분출되어 기분 상승을 유도하게 된다. 코티졸의 적당한 분비는 우리의 신체 활동을 상승시켜 기분을 좋게 만들고 면역력 향상에도 큰 도움을 주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가 된다면 면역력 약화로 인해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코티졸은 머리로 가서 해마의 뇌세포를 공격한다.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억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135). 기억의 적이 우리의 뇌를 침범할 수 없는 묘안을 찾아야 한다. 기억이 나 자신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나를 남과 구별해주는 삶의 꽃밭이다. 과거에 심은 꽃씨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먼 훗날 기억의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이다.

 

인간의 단기 기억은 7개가 한계이다. 전화번호나 요일이 7자리 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145). 미국 클리포드 나스(Clifford I. Nass) 교수는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들의 뇌 구조를 연구했다. 실험 결과, 멀티태스킹 경험이 있는 직장인들은 '복잡하고 깊은 사고를 하기 힘들다. 산만하고 주의력이 떨어진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충동적으로 변한다' 등의 테스트 결과를 보여주었다(147).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나스 교수는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들의 뇌는 심하게 뒤엉켜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149). 멀티태스킹 그룹의 뇌에서는 배외측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곳은 어떤 일에 집중할 때 반드시 활성화되는 곳이다(150). 이런 상황을 가천의과대학교 뇌과학연구소 김영보 교수는 ''무엇이든 다른 데이터를 언제든지 가져와서 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집중을 안 하는 것도 일종의 버릇이라는 것이다. 즉 집중을 안 하니까 기억력이 약해진다는 결론이다(151). 주변의 사소한 일들을 기억하 못하는 현대인의 기억력은 집력의 약화에 원인이 있다는 함의라 하겠다.

 

MRI를 이용하여 촬영한 뇌의 해마 부분을 살펴보면, 반복적으로 사용한 해마의 머리 부분 및 꼬리 부분이 크게 나타난다. 해마의 머리 부분에서 담당하는 뇌 기능은 새로운 정보를 표현하는 기능으로, 해마 머리 부분에 문제가 있으면 기억력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해마 머리 부분에 이상이 생기면 언어 기억력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이해 및 회상과 관련된 기억을 관장하는 것이 해마 머리 부분에서 하는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또한 해마 머리 부분에서는 연상 기억 혹은 연관 기억을 담당하고 있는데, 뇌의 여러 부위와 연결되어 관련된 기억을 관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 실행 기능 혹은 집행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작업 기억에 대한 정보 혹은 행동에 대한 집행 및 감시를 하는 중요한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뇌의 전전두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전전두엽에서 실시되는 여러 기능을 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156). 해마의 꼬리 부분은 공간 기억력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주위에 대한 위치 정보 및 방향 정보에 대한 이해력과 익숙한 장소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곳이다. 또한 해마의 꼬리 부분에서는 특정 정보에 대한 회상을 관장한다(158). 이렇게 기억의 중추를 담당하는 해마의 적은 과음이다.

 

흔히 '필름이 끊긴다'고 말하는 단기 기억상실을 의학 용어로 'Black Out'이라고 지칭한다. 알코올은 뇌에 있는 신경전달물질의 기능을 변화시켜 대뇌 부위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킨다. 이후 대뇌의 측두엽 해마 부분에 직접 영향을 미쳐 뇌의 정보 입력 과정에 이상현상을 일으키게 된다(171).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되면 티아민(thiamine)이 부족해져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필름이 끊기는 '베르니케 코르사코프 뇌증(Wernicke-Korsakoff syndrome)'에 걸리게 된다. 또한 이 상황이 지속되면 알코올성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173). 술을 마시면 알코올은 혈관을 통해 간으로 들어간다. 간에서 알코올이 제대로 분해되지 않으면 아세트알데히드(Acetaldehyde)라는 물질이 생긴다. 이 물질이 특히 뇌의 해마를 공격해서 아예 기억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175). 과음이 기억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그래서 사람은 괴로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지도 모르겠다. 괴로움을 비우고 싶어서.

 

뇌는 재생성이 안 될까? 뇌세포가 재생성한다는 것은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는 함의이다. 이는 뇌 과학의 혁명이 될 것이며, 우리의 간절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 보다 우선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감퇴할까? 뇌도 신체의 일부이므로 노년의 뇌가 젊은 뇌보다 기능이나 활동성이 떨어져 신체 반응이나 집중력이 저하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신체 능력이 저하된다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질병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뇌가 만들어내는 능력은 오히려 좋아진다. 빠른 판단보다는 적합한 판단 능력이 강해지고, 전체적 인생 경험에 따른 지혜를 밑바탕으로 종합적인 인지 능력이 크게 발달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뇌가 함께 늙어가는 것은 아니다(182). 기억력 유지 및 강화의 명약은 꾸준한 운동이다. 운동으로 몸은 피로해지지만 내 몸에서 신경전달물질이 많이 나오게 되고, 이렇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세로토닌(Serotonin) 등의 물질이 많아지기 때문에 신경은 즐거워진다. 아드레날린(adrenalin)의 분비로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이와 더불어 세로토닌 등의 물질이 많아지면 신경세포는 자극을 받아서 더 활성화된다. 이러한 사이클을 통해 운동을 할수록 신체는 피로해지지만 신경세포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186). 인지 활동을 열심히 하면 노화에 따른 인지 기능의 감퇴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또한 뇌에 상해를 입거나, 알코올성 치매에 걸리거나, 뇌졸증에 걸려도 활발한 인지 활동을 통해 인지 기능 감퇴를 유보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일부 심리학자와 신경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두뇌 창고 이론'이다. 높은 수준의 교양과 지능지수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알츠하이머 투병기간을 훨씬 잘 견딘다고 한다. 알츠하이머 병변을 보유한 사람이더라도 꾸준히 두뇌 활동을 한다면 인지 능력의 큰 쇠퇴 없이 생활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신체적정신적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긍정적인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190). 삶은 건강한 뇌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삶은 흐르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인생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우는 것일까?(197).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정보들을 눈에 있는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송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뇌에 저장한다. 이러한 기억 저장이 가능한 것은 기억이 뇌 속 에너지 파동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억은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한다. 외부자극이 뇌로 들어오면 시냅스, 뉴런의 스파인으로 전파되면서 3차원 영상으로 구현된다. 또한 기억은 한 곳에만 저장되지 않는다(200). 우리의 뇌가 기억을 분산 저장한다는 것은 독특한 신비로움이다. 그것은 기억의 저장 및 재생 방식에 대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인류는 오래전에 그것을 터득하여 생활하고 있을 듯도 하다.

 

'기억의 메카니즘'을 연구한 칼 프리브람(Karl Pribram) 교수는 한 번 저장된 장기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감각기관을 통해 입력된 정보 가운데 선택된 정보들은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이때 장기 기억은 초점이 맞지 않는 상태로 뇌의 여러 곳에 분산돼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후 장기 기억을 불러낼 단서를 제공하면 파편 같은 조각들이 초점을 맞춰 다시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홀로노믹(holonomic) 이론'이라고 한다(202). 뇌의 홀로그램은 어떤 물질적인 구조가 아니라 에너지장과 같은 구조를 말한다. 이를 영점 에너지장(zero point field)이라고 한다(205). 홀로그래피(Holography)는 빛의 간섭을 이용하여 입체 정보를 기록하고, 재생,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입체 영상의 기록술을 뜻하는데, 홀로그램은 그 기술로 촬영된 것을 가리킨다(206). 홀로그램(Hologram)'완전하다''holos''그림'이라는 'gram'의 합성어이다. 즉 완전한 그림, 사진이라는 뜻이다. 홀로그램은 레이저 광선으로 2차원 평면에 3차원 입체를 묘사하는 기술이다. 1948년 영국 물리학자 데니스 가버(Dannis Gabor)가 이 원리를 발견해 197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대부터는 레이저 개발로 이를 이용한 응용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현재 신용카드, 각종 서적, 테이프에도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208). 칼 프리브람 교수는 우리의 뇌가 여러 주파수 영역의 입력에 의지해 현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뇌는 감각을 거쳐 가장 높은 주파수인 1015Hz(백만십억Hz)의 눈에 보이는 빛부터 가장 낮은 주파수인 20Hz 정도의 가청음까지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208). 우리의 뇌가 외부의 주파수를 해석하여 물질적인 현실을 수리적으로 구성한다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세상의 존재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209). 우리의 뇌는 이처럼 온통 미지의 우주다. 우리가 영원히 비행할 신비로운 별들의 세상.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 교수의 '망각 곡선'에 따르면, 인간은 학습한 지 몇 분이 지나면서부터 망각이 시작돼 약 20분 후에는 42퍼센트의 기억이 사라지고, 한 시간 후엔 56퍼센트 이상의 기억을 잊게 된다고 한다. 이후 하루가 지나면 66퍼센트, 일주일 후에는 75퍼센트, 한 달 후에는 80-90퍼센트 이상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한다(218). 알치노 실바 교수는 ''기억을 잘하려면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부사항을 잊어버려야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잊는다는 것은 역으로 인간의 기억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말해준다(219). 인간은 잠을 자면서 중요한 기억은 남기고 필요 없는 정보는 지운다(227). 수면의 역할은 깨어 있는 동안 연결된 무수한 시냅스의 연결고리들을 중요도에 따라 정리해 주는 것이다(228). 뇌는 낮에는 활발히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통해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 중 뇌가 활발히 활동하는 수면 단계를 렘 수면 단계라고 하는데, 이 상태에서는 뇌가 낮 시간에 학습할 때 일어나는 활동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렘 수면 단계 때 꿈을 꾸는데, 이 상태에서 기억이 정리되고 정돈된다(233).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자면서 보낸다. 그만큼 잠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며,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제공해 준다. 수면은 고갈된 신경전달물질을 보충해 활발한 뇌 활동을 도와준다. 또한 뇌신경세포의 발병을 막아주는 자기방어 역할도 한다. 따라서 잘 자는 것은 뇌 기능을 적절히 유지하고 건강을 지키는 첫 걸음이다. 잠을 잘 자면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234). 하루 동안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숙고하는 때가 수면 시간이다. 잠자는 사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착상이 떠오른다. 특별히 관련이 없는 정보들을 연결하고 새로운 연관을 만들어내며 창의성을 낳게 된다. 서로 잘 들어맞지 않는 생각들과 기억들을 연결하는 것이 바로 창의성의 기본이다(234). 꿈과 기억은 같은 발생 원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추억이 없는 사람은 꿈을 꿀 재료가 없는 것이다. 꿈 또한 기억을 저장, 강화, 변형해 나가는 기억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238). 세계 최고의 대학진학률과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기민한 생활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 중에 세계적인 석학이 없고, 신문명을 이끌만한 지도자가 없는 것은 꿈 많은 청소년 시절에 꿈꾸지 못한 잠의 부족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생물들은 생존과 직결된 경험을 축적하거나 생존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할 때는 대뇌피질에서 세티파가 발생하여 주기억 저장 장소인 해마에 전달된다. 이때 발생한 세티파는 해마의 신경세포에 저장되어 세티파를 발생시켰던 상황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된다(238). 기억은 다양한 경험과 사물을 체험하며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정보라도 지속적으로 저장되었을 때 오래 유지되는 것이다. 즉 같은 정보를 열 번 보았다면 그 정보를 열 배 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몇 십 배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241). 이렇듯 우리의 뇌는 반복적인 학습과 기억을 좋아하고 효과를 더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의학 용어로 '외상'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말한다. 특히 신뢰를 유지한 관계에서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받아 생기는 트라우마를 배신 트라우마라 한다 (246). 어린 아이가 믿고 따르는 어른으로부터 학대를 받은 경우, 학대 기억을 억누를 가능성이 높다. 이를 배신 트라우마(Betrayal Trauma)라고 부른다(244). 에일린 주브리겐(Eileen Zurbriggen) 교수는 배신 트라우마는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아이의 뇌가 생존을 위해 찾아낸 해결책이라고 한다. 정신적 충격을 받고 분노하거나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대신 부모의 학대를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학대받은 사건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거나 그냥 멍하게 있거나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부모에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어 그들과 다시 친밀하게 연결되고 보살핌 받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악몽을 지우는 뇌의 작용을 의학에서는 '해리성 기억상실'이라고 한다(245). 이와 같은 트라우마는 사회와 인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빛이 되기도 하지만, 폭력과 순종을 조정하는 잔인한 쇠뇌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평생 기억 속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파리의 의사이자 병리학자였다.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 찾아온 천식과 병약한 몸 때문에 침실을 벗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그렇게 덧없는 세월이 스쳐갔다. 그는 벼랑으로 미끄러지는 자신의 삶을 붙잡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 재료는 기억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관에 의지하여 기억 속의 삶을 끌어냈다. 그는 작품에서 한 조각의 과자 맛과 냄새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의 시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냄새와 연결된 기억이 잘 떠오르는 현상을 뇌 과학에서는 '푸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후각 신경은 다른 감각신경과 달리 변연계의 편도체와 직접 연결돼 있다는 것을 백 년 전 한 소설가가 알아낸 것이다(249). 푸루스트 현상이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현상이라면, 반대로 어떤 기억을 자극하면 이와 연결된 냄새 기억이 되살아날 수 있는데, 이를 '역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문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이다. 따라서 문학과 과학의 상관 관계를 크게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때론 과학의 비밀이 곳곳에 숨겨져 있기도 하다(252). 문학을 단순히 허구의 세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나이가 들수록 긍정적인 것을 더 기억하는 경향은 경험을 통해 쌓이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고통받지 않고 더 잘 살기 위한 새로운 뇌 회로가 발달되기 때문이다(271).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향상되는 두뇌 기능들도 존재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감정 기능이다. 나이가 들면서 부정적인 감정은 줄어들고 현실의 작은 일에도 행복함을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이 점점 높아진다. 바로 감정을 조절하는 전전두엽의 기능 변화에 따른 것이다(272). 지우고 남는 기억,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273). 무엇을 지우고 남길 것인가? 팔다리 모두가 없는 상태로 태어나 신체 비관으로 세 번의 자살을 시도했던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1982~)는 말한다. ''가끔은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어떤 기억을 반드시 간직해야 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기억은 바꿀 수 없어요. 바꿀 수 없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지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아픈 기억이 있고, 평생 남는 기억도 있겠지만 나쁜 기억 때문에 장애가 되지 말고 좋은 기억에 집중하며, 나빴던 시간에서 교훈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세요(275)'' 그의 말로 글을 매듭지으려고 한다.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의 언어 중에서.

▲ 차용국, 기억  ©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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