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해전사

차용국 | 기사입력 2021/04/28 [04:26]

임진왜란 해전사

차용국 | 입력 : 2021/04/28 [04:26]

▲ 임진왜란 해전사     ©강원경제신문

임진왜란 해전사 / 이민웅 지음, 2014

 

차용국 시인ㆍ문학평론가

 

 우리의 근대화 정신은 터무니없는 왜곡의 칼날에 찔려 혼란스럽게 연명했다. 비록 근대화란 개념이 통일된 것도 아니고, 정치경제사회적인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될 수도 있지만, 시대정신의 측면에서 합리성과 개방성 확산과 그러한 방향으로의 사회 구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주권을 빼앗긴 우리나라는 일제가 기획한 근대화에 동참하거나 저항하는 모습으로 일그러졌다.

 

이순신 연구에 관한 비근대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제 치하에서 이순신만큼 민족의 자부심을 높일 만한 인물은 없었다. 암울한 시대를 밝히는 등불을 만난 것처럼 이순신이란 인물 자체가 범상치 않은 불세출의 영웅으로, 그의 순국이 마치 나라사랑의 절정인 것처럼 미화되었다. 물론 임진왜란, 특히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이순신을 빼고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영웅 이순신의 순국 공덕으로 미화된 역사는 감동은 있을지 몰라도 진실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영웅사관과 순국사관은 오히려 진실을 방해하고, 필부인 우리 모두를 숙명론에 순종하도록 몰아붙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임진왜란은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1592413일부터 일본군의 철수가 종료된 159811월까지의 7년의 전쟁을 말한다. 이순신은 15912월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어 159811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니, 그의 삶에서 임진왜란은 시작과 끝이었다. 저자처럼 임진왜란을 크게 초기 전쟁기(1592~1593. 4), 강화 교섭기(1593. 5~1596), 정유재란기(1597~1598. 11) 등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18). 조선 수군은 각 시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먼저 초기에는 전승을 통해 불리한 전쟁의 국면을 회복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했고, 강화 교섭기에는 위기를 극복하고 전력 강화에 최선을 다했으며, 마지막 정유재란 시기에는 결정적인 두 차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7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19). 그 중심에 이순신이 있었다. 그러면,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 승리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일본 수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오로지 이순신의 영웅적 활약에 기댄 것일까?

 

임진왜란 개전 초기 조선 수군의 조직과 규모 및 전력 등을 살펴보면, 결코 일본 보다 열악하지 않았다. 적어도 원균이 1597716일 칠천량 전투에서 참패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조선 수군의 전력이 우세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칠천량 전투는 정유재란 첫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처음이자 유일한 패배를 당했다. 1597225일 이순신으로부터 통제사를 인수한 원균 함대는 궤멸했고, 수군 지휘부의 원균, 이억기, 최호 등이 전사했다. 겨우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탈출한 전함은 12척뿐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요인이 왜구의 출현이다. 왜구에 관한 정의에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략 일본 열도와 대마도의 해상 세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왜구는 정상적인 해상 무역을 통해서 문화와 물자를 교류하기도 했지만, 침략과 약탈이라는 해적 행위도 자행했다. 인접 국가인 조선과 중국에서 왜구 방어는 매우 중대한 국가적 현안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한 전쟁 영웅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왕조 개창에 성공한 것(32)처럼 왜구 문제는 국가적 관심과 변혁의 요인이었다. 왜구는 일본 수군의 뿌리가 되었다. 자세히 말하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근원이 되는 해적 집단들은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여 중앙정권의 직속 수군이 되거나 혹은 각 다이묘 휘하의 수군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쳤다(61). 일본 수군이 왜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수군의 편제와 전력 및 전투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함의한다.

 

조선 수군은 왜구를 대비하기 위하여 양성했다. 당연히 육군과 다른 새로운 병종(兵種)으로 독립된 편제와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마도 정벌을 주도한 태종 때 거북선 건조와 428척의 군선을 보유하였고, 이보다 40% 이상 증가된 613척 규모의 수군 건설을 계획하여 실행(34)한 사실도 <태종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국대전> "병전"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해서 추정해보면 대략 5만여 명의 수군과 700여척의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판옥선을 주선으로 한 군함 건조와 천자총통지자총통 등 화포 개발도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판옥선은 한선의 일반적인 구조인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다(45). 거북선도 이 판옥선에 철갑을 덮은 군선이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U자형 평저선이라면, 일본 수군의 주력 함선인 아다케와 세키부네는 V자형 침저선이다. 일본 수군의 기본 전법은 왜구 때부터 구사한 '등선육박전술'이다. 판옥선은 선체가 높아 일본 수군의 이 전술 전개를 어렵게 했다.

 

이순신은 위대함은 첫째 선대로부터 계승 발전시켜온 우수한 수군 전력을 강화하고 치밀한 전술로 완승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칠천량 참패로 인해 와해된 열악한 수군력으로 명랑해전 승리를 이끈 리더십이다. 첫째는 임진왜란 대부분의 전투에서 일관되게 전개한 전술이며, 둘째는 정유재란 이후 전란 말기 전투의 특수한 상황에서 펼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임란 초기 조선 수군의 전력이 우세 또는 대등할 때와 수군 궤멸 후 현저히 불리한 전력일 때에 따라 다른 전술과 리더십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나는난중일기를 읽고 이순신은 병약하고, 꼬장꼬장 원리원칙 따지며, 시류에 야합할만한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꽉 막힌 인간처럼 보인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그가 전투를 얼마나 신중하고 치밀하게 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전투는 목숨을 걸고 벌이는 대사이며, 총탄은 호언장담이나 용기를 피해가지 않는다. 이순신은 이런 전투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대비한 리더로 보인다. 이순신은 아군의 사상 없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 리더처럼 보인다. 깊은 휴머니즘이 느껴진다. 사실 이순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딱히 눈에 띄는 특징으로 15879월 조산만호로 있을 무렵, 북호가 녹둔도의 둔전에 침입하여 병사 10명을 살해하고 주민 160여 명을 사로잡아 간 사건이다. 경원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 등이 추격하여 적호 3명을 참살하고 50여 명을 되찾아 왔지만, 이 일로 이순신은 파직되어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적추 우을기내를 유인 체포하는 공을 세워 죄를 사면 받았다(48). 이런 뼈아픈 실전 경험은 이후 부대 운영과 전쟁을 대비하는 리더십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대비태세를 철저히 준비한 이순신 함대는 마침내 159254일 제1차 출전을 시작했다. 이순신 함대의 세력은 전선(판옥선) 24, 협선 15, 포작선 46척으로 모두 85척이었다(79). 56일 원균의 경상우도 전선 4척과 협선 2척이 합류하여 전선 28, 협선 17척이 되었다. 이순신은 57일 첫 전투인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에서 승리하고, 다음날(58) 적진포해전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일본의 대선 26, 중선 9, 소선 2, 기타 선박 7척 등 도합 44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와 함께 해전에서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82). 값진 승리의 기억은 이순신 함대의 연승 행진의 초석이 되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승리의 비밀을 알아내고 공유했다. 승리는 철저하게 준비해서 거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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