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요우커에 시달린 물결이 잔잔해지면 샛별 하나 내려앉아 머리를 감고 잠시 졸다 가는 밤섬에 자장가 흐르면 호수가 꿈을 꾸는 시간
베이퍼피쉬가 솟아올라 물뿜질하고 임연수어가 고래처럼 유영하고 누가 빛을 주지 않아도 자체발광하는 호수는 바다를 품어보지
집채만한 파도가 밤섬을 삼키기도 큰바람 불어와 유람선을 뒤집기도 복수의 칼 겨누던 푸른 바다를 보는 호수는 비장한 꿈을 꾸었어
어둠 걷히면 부끄러운 호수는 다시 얼굴에 홍조를 띠고 비웃음을 단 유람선 모터 소리에 후다닥 잠을 깨지만 그래도 호수는 꿈이 있어 행복하다네
- 호수(湖水)의 꿈 -
49. 태호(太湖)의 잠 못 드는 밤
연수와 방동혁 부장, 그리고 박수현 차장은 호텔에서 나와 이한경 상무와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향했다
김기훈 상무와 면담을 끝내고 아래층 회의실로 내려온 연수가 제일 먼저 얼굴이 떠오른 이한경 상무에게 전화를 한 건, 한시라도 빨리 이한경 상무에게 사실을 알려 기현자동차 중국법인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과 이상일 전무가 어떤 사람인지, 법인 내부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있는 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연수의 전화를 받은 이한경 상무도, 통화하는 연수의 곁에서 연수의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방동혁 부장과 박수현 차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베이트 의혹이 단순히 협력업체의 문제가 아닌, 기현자동차 내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 파장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한경 상무는 전화로 할 얘기가 아닌 것 같다며 당장 예청을 출발해서 무석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연수도 이상무와 좀 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것 같아 만나서 얘기하자며 며칠 전 이선 과장과 같이 저녁 식사를 했던 곳에 다시 약속 장소를 잡고 통화를 마쳤다
아침저녁으로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를 느낀 연수는 약속 장소를 향해 일행과 함께 걷다가 외투의 옷깃을 세우며 이제 막 수평선 끝에서 일몰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태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내기라도 하는 듯 눈 부신 햇살이 잔잔한 호수의 물결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의 힘든 하루에 여운이라도 남겨 주려는 듯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태호의 노란 물결이 서서히 붉은 기운이 감돌고 하루의 일과를 마감한 태양은 황혼의 배웅을 받으며 안식처를 찾아 태호의 작은 섬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이한경 상무는 연수 일행보다 먼저 와서 지난번과 같은 한적한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연수가 방금 보았던 일몰을 감상하고 있던 듯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가 연수네 일행이 다가오자 그제서야 눈을 돌리더니 일어나 일행을 맞았다
"바쁘실 터인데 이렇게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수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이한경 상무도, 그리고 방부장과 박차장도 서로서로 인사와 함께 이상무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연수가 이상무의 맞은 편 자리로 가서 앉자 방부장과 박차장도 각각 연수와 이상무의 옆자리에 앉고 곧이어 이상무가 미리 주문해 놓은 요리와 맥주 몇 병이 금방 테이블에 차려지고 맥주잔도 채워졌다
"장상무님의 전화를 받고 여기로 오면서 줄곧 생각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장상무께 서류뭉치를 건넬 때 막연하지만 혹시 이런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적이 있었는데 걱정했던 일이 실제 눈앞에 닥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이상무가 한숨을 푹 쉬며 말을 내뱉자 연수도 한숨을 내쉬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어떻게 우리 법인의 핵심임원이 협력업체 리베이트 의혹에 연루돼 있는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 나가야 할지, 저도 참 난감합니다.
단순하게 있는 사실만 그대로, 그리고 우리 태스크포스에서 밝혀낼 수 있는 것들만 밝혀내서 최고경영층에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옆에 있던 방부장과 박차장은 두 사람의 주고받는 말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맥주잔을 비우고 있었다
"제가 드린 서류에 명단과 함께 협력업체 리스트가 같이 있었던 것은, 사실 이상일 전무가 이상하리만치 협력업체들과의 술자리나 골프모임이 많고 여기저기 출장을 많이 다녀서 좀 의심스러운 구석을 피상적으로나마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좀 더 파헤쳐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 이상일 전무가 만난 업체들과 사람들을 정리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일 전무가 음주가무를 즐기고 골프운동을 좋아해서 그러려니 했었는데 모임이 너무 잦았거든요.
그리고 그 모임이 협력업체 사람뿐 만이 아니고, 우리 법인 내의 특정 인물들과 MH자동차 직원들, 중국 지주회사 사람들까지도 지속적으로 만나고 다니는 등, 우리 기현자동차 중국법인의 구매본부장 역할을 넘어서는 활동반경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우리 중국법인의 판매상황이 어려워지고 덩달아 생산이 차질을 빚고, 연쇄적으로 협력업체들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구매본부장의 책임은 비교적 한 발짝 떨어져 있다고 해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닌 법인 임원들 모두의 책임이고 심각한 상황인데도 구매본부장의 표정은 항상 여유가 있었습니다.
마치 동방그룹이나 상달그룹에서 파견을 나온 무책임한 중방 쪽의 경영진처럼...
그런데 그게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배신을 안겨주는 일이 숨겨져 있었다니 참 분노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얘기를 마친 이상무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다시 모인 것이니 좀 본격적인 논의를 해야겠습니다.
우선 이상무님께 궁금한 것을, 하나 더 여쭐 것이 있는데 조금 전에 서류뭉치 건을 얘기하시면서 이런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나 하고 우려하셨다고 했는데 혹시 그것 말고 이상무께서 우려했던 또 다른 상황은 없었습니까?"
연수가 이런 질문을 이한경 상무에게 던진 것은 이상무가 서류를 연수에게 건넬 때부터 이상무는 어느 정도는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상무는 본인의 직책상 자신이 직접 파고들어서 문제를 밝혀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는 못해도 그룹의 중국사업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다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고,
그룹의 중국사업이 돌아가는 상황을 중국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끼며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면 이한경 상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무심한 태호의 밤이 깊어가고 가로등 불빛이 점멸하며 별을 닮아가고 있었다
註 : 본 시소설은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소재로 한 픽션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강원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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