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제국(27)

詩가 있는 詩소설

정완식 | 기사입력 2021/06/11 [01:01]

바람의 제국(27)

詩가 있는 詩소설

정완식 | 입력 : 2021/06/11 [01:01]

▲     ©정완식

 

자금성 석회암 바닥에 머리 찧고 
삼전도 성벽 앞에서 머리 조아려  
항복을 맹서하던 치욕이 이랬구나 

 
내 탓이 아닌데 내 탓이 된 
골품제에 갇힌 노리개가 되어  
쩐의 장막 뒤 어둠 속에 숨어야 했다 

 
일천구백구십구 년의 
봄은 승자독식의 전리품이 되어 
윤중로 벚꽃은 더 이상 피지 못하고 

 
닫힌 입술로 떨어진 봉오리는  
무심한 봄비에 씻겨 한강을 물들이고 
풋풋한 젊음이 명예를 안고 같이 흘렀다 

 
이제 일천의 젊음에 늦은 용서를 비나니 
못다 핀 꽃봉오리여 부디 
윤중로에 만개하는 봄으로 다시 오라 

 
- 윤중로 벚꽃 - 

 
28. 굴욕(屈辱) 

 

 
그러나 기존 기현자동차 그룹의 다섯 개의 완성차 관련 회사가 통합되고 다른 부품 계열회사들도 연이어 통합작업을 거치면서 중복된 부문의 많은 직원은 결국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버티지 못한 직원들은 스스로 각자의 살길을 찾아 떠나갔다 

 
오갈데가 없어 눈치만 보며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버티던 직원들도 명예퇴직이라는 미명으로 강제적으로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규모는 각기 달랐지만 다섯 개 완성차 관련 회사의 동일 부문, 동일 직군의 인원을 합쳐 놓으니 소위 합병회사에서 필요한 각 부문 소요 인원의 두 배가량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차장급 이상의 부서장급, 팀장급, 임원급 인원들은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갖고 후배들을 위해 용퇴하기도 하고, 

 
줄을 잘 서고 소위 ‘빽’이 있는 사람들이나 로비 꽤나 하고 다니던 사람들은 용케 살아남기도 하고,

 
규모가 작은 계열회사나 협력업체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과 비교적 젊은 직원들은 약간의 위로금을 받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무턱대고 떠나갔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고참급 대리나 과장급처럼 애매하게 끼어 있던 중간 관리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선배들을 떠나보내며 의지할 곳이 없어져 불안해 했고, 후배들을 떠나보내면서도 붙들지는 못하고 미안해하기만 했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기존 기현자동차의 임원급이나 부서장, 팀장급이 떠난 자리에는 MH자동차나 MH그룹의 조그만 계열사들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점령군처럼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고, 

 
얼마 후, 마음 줄 곳이 없던 기현자동차 직원들에게는 다시 한번 두 번째 명예퇴직이라는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근속년수에 따라 일정분의 급여를 위로금으로 받고 나갈 것인지, 

 
소위 ‘점령군’ 아래 자존심 버리고 굴욕적으로 일할 것인지를 선택받아야 했다 

 
자존심 버리고 남는다고 해도 또 언제 명예퇴직으로 내몰릴지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많은 직원들이 결국 사직원을 제출해야 했다 

 
젊은 일천여 명의 직원들을 포함해 전 직군을 합쳐 모두 오천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사직서를 작성했다 

 
‘점령군’들은 부문별로 명예퇴직 신청 인원 규모를 파악해 사직원 제출자가 너무 적은 부문은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일정 규모가 넘을 때까지 계속 사직을 종용하고 압박하기도 했으며, 

 
반대로 퇴직 신청 인원이 너무 많아 나중에 조직운영이 어려울 거라 판단되는 부문은 사직원 철회를 종용하고 설득해 주저앉히기도 헀다 

 
연수는 신입사원 채용 관련 업무를 하면서 전문 경영체제의 당위성과 우수성을, 문어발식 그룹 구조가 아닌, 수직계열화된 자동차 전문그룹 구조의 정당성과 비전을 지원자들에게 역설했었으나 

 
결과는 그가 그렇게 채용한 신입사원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비참함을 맛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신입사원들이 떠나겠다며 사직원을 들고 올 때마다 조금 더 참고 버텨보자고 사직원 제출을 만류하던 연수로서도 더 이상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진정 무엇이 문제였던가? 

 
뒤돌아보고 스스로 질문해 보아도 답답하기만 했다 

 
다만 신입사원들, 젊은 직원들을 비참하게 이 꼴로 이끌어 온 경영진들, 선배들이 미웠다 

 
뜨거운 지난 여름날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살 길을 모색하느라 그룹의 자산과 계열사들을 정리하기 위해 비상조직위원회의 일원으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그런 직원들을 위로한다며 사무실을 방문해 눈시울을 적시며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미안해하며, “늦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자”고 말하던 그 전문경영인에게 달려가 따져 물어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고 돌이킬 수도 없었다 

 

 

별들의 전설이 숨어 흐르는 

윤중로에 봄비 내리고 

세상이 온통 까맣게 지면 

색바랜 흑백 사진첩이 

일천 가지의 색으로 살아난다 

 

이십이 년의 세월지나 

총천연색 활동사진으로 재생되는 

일천 개의 역사는 

저마다의 색으로 살아나니 

적어도 일천 명의 독자는 있으리 

 

과거의 현재를 찍어 온 흑백사진은 

이도 칼라가 아닌 

그들이 여태껏 살아온 

꼭 그만큼의 색깔을 갖고 있다 

봄비에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 일천 장의 흑백사진 - 

 

 

註 : 본 시소설은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소재로 한 픽션임을 알려드립니다.

ㅇㄷㄱ 21/06/11 [09:00] 수정 삭제  
  슬픈 현실이네요..ㅠㅠ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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