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현판, 왜 세로로 걸었을까?

정명훈 기자 | 기사입력 2013/05/06 [10:49]

숭례문 현판, 왜 세로로 걸었을까?

정명훈 기자 | 입력 : 2013/05/06 [10:49]

 
브레이크뉴스 정명훈 기자= 지난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훼손됐던 숭례문이 5년 3개월 만에 전통방식으로 복구돼 옛 위용을 되찾았다. 그런데 ‘숭례문’현판이 다른 곳과 달리 세로로 걸려 있는 이유와 현판 글씨를 쓴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 논란을 살펴본다.
 
숭례문의 이름은 정도전이 짓고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
 
‘崇禮門’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꿨던 정도전은 조선이야말로 유교를 정치, 학문, 도덕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교는 인(仁), 의(義), 례(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숭례문은 이를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인데, 숭례문의 "례(禮)"는 방향으로는 남쪽, 오행으로는 ‘화’(火)에 해당한다.

현판 글씨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 이제(1394∼1462)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판 자체에 글 쓴 사람의 낙관이 없고 실록 등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어 신장·안평대군·정난종·유진동 등이 숭례문 현판 글씨를 쓴 인물로 꾸준히 거론돼 왔다. 그 중 주요 인물로 언급되는 이가 양녕대군과 신장, 그리고 유진동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 경회루(慶會樓)의 현판을 썼을 만큼 필력을 인정받았다. 고종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는 남대문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까지 양녕대군이 공식적인 숭례문 현판의 서자(書者)로 인식돼왔음을 보여준다.

조선 초기 문신 신숙주의 아버지인 암헌(巖軒) 신장(1382∼1433)이 숭례문 현판글씨를 썼다고 주장한 인물은 추사 김정희다. 그는 『완당전집』(阮堂全集) 제7권에서 “숭례문 편액(扁額)은 곧 신장의 글씨인데 깊이 뼛속에까지 치고 들어갔고…”라고 썼다. 지난해 그의 후손들이 펴낸 책 『암헌 신장전기』(태학사)에는 “숭례문 현판이 당시 조선시대 현판글씨의 전형인 설암체를 따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조선 초기 설암체의 대가였던 신장공의 글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적혀 있다.

현판의 교체 가능성도 있다. 죽당(竹堂) 유진동(1497~1561) 역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1744~1808)가 쓴 백과사전 『주영편』(晝永編)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펴낸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에 그가 숭례문 현판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숭례문 복구 과정에서 왜곡된 글씨 바로잡아
 
이번 복구 작업 중 한국전쟁 당시 훼손된 글자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필체가 왜곡된 사실을 발견한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양녕대군의 사당인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지덕사(至德祠) 소장 숭례문 현판 탁본자료와 일제시대에 촬영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을 입수해 비교분석 작업을 벌였다.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李承輔, 1814~1881)가 1865~1871년 사이에 만든 지덕사 탁본은 글자와 현판의 나뭇결까지 그대로 찍혀 있는 진본이다. 탁본을 현재의 현판과 대조한 결과 ‘崇’자와 ‘禮’자에서 개별 획 삐침의 형태, 폭, 연결 등에서 일부 달라진 부분이 확인돼 이를 바로잡았다.
 
숭례문 현판이 세로로 걸린 이유는 이화치화(以火治火)
 
숭례문 현판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검은색 흑칠을 한 바닥판에 양각으로 글씨를 돋을새김하고 백분(白粉)을 칠한 것은 조선시대 궁궐 현판의 전형적인 제작방식이다. 하지만 3~4자로 이뤄진 현판이 대부분 가로글씨인 것과 달리 숭례문 현판 글씨는 세로로 씌어져 있다. 조선시대 궁궐이나 도성 현판 중 세로형 현판은 창덕궁의 어수문(魚水門)을 비롯해 몇 건에 불과하다. 그런데 유독 남대문의 현판은 세로로 세워졌다. 사연인즉 이렇다. 이성계가 서울로 천도하기 위해 도성을 정하고 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남향으로 안치하려다 보니, 서울의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대치되었다.
 
관악산은 마치 그 모양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예부터 이 산을 불의 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이라 했다. 풍수가들은 여기서 뿜어 나오는 강한 화기가 궁성을 범한다고 보았다. 화기로부터 궁성을 보호할 방책이 필요했다. 풍수에서 화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지만 관악산에서 뿜어내는 화기를 한강이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하게 했다. 그리고 문의 현판을 종서(縱書)로 써 세로로 세우게 하였다. 현판 이름도 화기를 누르라는 뜻으로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 원래 숭례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숭례문의 례(禮) 자는 오행으로 볼 때 불(火)에 해당된다. 여기에 '높인다', '가득 차다'라는 뜻을 가진 '숭(崇)' 자와 함께 써서 수직으로 달아 마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이 되도록 했다.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以火治火)는 화재방지책인 셈이다.
 
그러나 화기를 다스리고자 했던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으로 <논어>에 ‘입어례(立於禮)’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다. 이 말은 ‘예를 통해 사람이 일어난다’는 뜻에서 ‘일어난다’라는 말이 ‘선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 숭례문 편액을 세워서 달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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