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잘 있겠지
만보에 도달하여
뒤를 돌아다보니
지긋이 웃고 있는
그림자의 모습이
오늘은 친근하다,
오래된 나의 친구.
뒷산 이름도 없는
주인 없는 무덤가,
거기 가을이 되면
다래가 송글송글
나를 기다려 준다.
무덤의 풀을 깎고
다래를 따 먹으며,
산소에 하나 건네
가을 맛을 전했지.
하늘나라에 가야
떨어지는 그림자,
더 좋은 친구 누구,
자신 있으면 와봐.
바투
나를 지켜주는 너,
오늘 전해 줄 거야.
사랑해, 마니마니. 스트라이커
시평
이 시는 ‘만보’라는 일상적 행위를 출발점으로 삼아, 삶과 죽음, 동행과 고독을 조용히 포개는 작품이다. 만보에 도달한 순간 화자는 성취보다 회고를 택한다. 뒤를 돌아봤을 때 마주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낯설지 않다. 오래된 친구처럼 웃고 있으며, 오늘은 유독 친근하다. 이는 자기 자신이자, 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시간의 형상이다.
시의 중반부에서 무대는 이름 없는 뒷산과 주인 없는 무덤가로 옮겨간다. 소유와 명명이 사라진 공간에서 자연은 오히려 풍요롭다. 가을이면 다래가 송글송글 열리고, 그것은 화자를 ‘기다려 준다’. 기다림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인간 중심의 시간관을 내려놓는다. 무덤의 풀을 깎고 다래를 따 먹으며 산소에 하나 건네는 장면은 죽은 이를 애도하기보다 삶의 맛을 나누는 행위로 읽힌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교환이다.
후반부에서 “하늘나라에 가야 떨어지는 그림자”라는 구절은 인상적이다. 그림자는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놓일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전까지는 ‘바투’ 붙어 화자를 지켜준다. 마지막 연의 고백은 과장되지 않고 담백하다. “사랑해, 마니마니.” 이 소박한 말은 결국 자신에게,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삶에 건네는 가장 솔직한 인사다. 잔잔하지만 오래 남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