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림삼의 초대시 **
- 생존자 일기 -
나는 죽어가고 있다 이미 통고받은 그 날짜를 채우려 한 발씩 한 발씩 다가가고 있다
시한부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하고 내 목 죄는 생명은 성큼 학 걸음걸이
산다는 것이,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이, 이다지 황홀한 기쁨임을 왜 진즉에 알지 못했는가!
저 밝은 햇살이, 찬 밤바람이, 노래하는 새와 시냇물이, 눈 부라리던 이웃들이 모두 내 사는 보람이었음을
가장 화려한 것이 가장 초라한 것의 또 다른 얼굴이었음을
나는 죽어가고 있다 어쩜 오늘 밤 화들짝 죽어자빠질 지도- 좀 더 살고 싶어! 더 좀 살고 싶어! 아주 조금쯤이라도, 그게 더 라면
나는 잠을 자지 못한다 이불 자락을 움켜 쥐고 동공 잃은 눈만 껌뻑거리며 나 살아있음을 듣느라고
- 시의 창 -
비교적 오래 전에 지은 시다. 아마도 30년은 더 묵은 것 같다. 당시에 이런 저런 일로 필자의 심리상태가 몹시도 불안해서, 마치 시한부라는 선전포고를 들은 것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었음 직 하다. 어쩌면 내일이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과 불안심리는 그 시절 필자의 삶을 꽤나 피폐하게 만들었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마지막 남은 소망자락을 움켜쥐고 발악을 하듯이 현실을 극복하여 헤쳐나갔던 가슴 저리는 추억이 있어,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퍽 안타깝고 우울하다.
늘 고백하는 거지만 대체 산다는 게 뭔지, 즐겁고 행복한 삶의 얼굴은 왜 유독 필자에게만 외면하면서 그리도 인색하게 굴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원통하다. 그러니 어쩌랴? 그렇게 본의 아닌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된 험난한 여로였을망정, 그것들이 모두 모여서 이룩한 줄거리가 바로 귀하고 소중한 필자의 한 평생 삶이었던 것을. 어느 한 시절의 삶이라도 그저 헛되이 버려서는 안 될 주옥같은 이야기들이었던 것을.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결국은 오늘의 필자를 빚어낸 원동력이며 근본이었음을 익히 알기에 그냥 그 모든 아픔들을, 슬픔들을 뭉뚱그려서 가슴 속 깊이로 묻어버린다.
‘백세 인생’이라는 신조어가 낯설지 않게 여겨진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그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각종 과학적인 데이터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울러 사람의 수명을 늘리게 하는 여러 가지 의약품이나 도구들이 속속 발명되기도 하고, 갖가지 운동법이나 건강관리 요령들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의 관심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목하 새로운 세상은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의 전성기로 열리고 있나 보다.
그러니 그 연령대의 대열에 슬쩍 한 다리 걸친 필자도 결사적으로 급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그다지 꼴사나운 짓거리는 아니리라. 아무튼 우리에게 남겨진 삶의 여분은 예측컨대 무지무지 길지도 모르는 것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제 2의 인생을 살기 위한 설계와 기획에 심사숙고해봐야겠다. 그러자니 이제부터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제법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농담 삼아 건네는 덕담 중에 기분좋게 감칠 맛 나는 내용이 있다. “정말 재수 없으면 당신은 백오십까지 살 지도 몰라요.”하는 말이다. 맞다. 필자도 정녕 재수가 아주 없을 지 누가 알겠는가?
어제의 시간이 흘러가고, 오늘이 어제로 지나가고, 내일이 오늘로 바뀌는 과정 속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체된다. 쉼 없이 변하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우리는 많은 의미와 진리를 부여한다. 그렇게 발전하며 상생하며 우리는 역사를 이어왔다. 또한 이 엄청난 세월의 축적에서 탄생된 문명과 자존의 가치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증명하며 시간을 압도해왔다. 그렇게 시간은 우리들의 도구였고 기록이었으며 내일로 향하는 교두보였다. 앞으로도 변치않는 진실을 우리에게 열어줄 시간의 이름이, 우리를 영원으로 이끌고 있다.
한 어머니가 어린 소녀에게 저녁식사에 사용할 감자를 가져다 달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자 어린 소녀는 그 중에서 제일 작은 감자를 골라서 가져왔다. “얘야, 왜 작은 것만 가져 왔니?”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제일 작은 것들을 먼저 다 먹으려구요. 좋은 건 아껴두었다가 먹는 게 좋겠지요. 그래야 나중엔 제일 크고 좋은 감자를 먹을 게 아니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작은 감자를 다시 창고에 쏟으면서 말해주었다.
“얘야, 그러면 우린 매일 작은 감자만 먹게 되는 것을 모르니? 오늘 먹을 감자는 제일 좋은 것을 고르렴. 그럼 매일 제일 큰 감자만 먹게 될 것이란다.” 하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중에 뭔가 큰 것을 주어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랑법이다. 서로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나중에까지 남겨 두는 것은, 결국 제일 작은 것을 지금 주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미래에 최선의 것을 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최선의 것을, 항상 최선의 것을 골라 서로에게 주려고 한다면, 우리는 매일 최선의 것을 즐기고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은 지금 바로 해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통상 사물의 가치를 어떤 기준에서 평가할까? 현대의 물질 문명에서는 물론 금전의 가치로 사물을 평가하게 된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대부분 금전의 가치가 먼저 잣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사물과 사람의 가치는 물질로 평가될 수 없다. 길가에 핀 들꽃은 물질적 가치는 사소하겠지만 우리에게 추억과 아름다움의 여백을 채워주는 면에서는 그 무엇보다 가치가 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의 잣대로 보면 값비싼 보석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사랑의 가치를 금전으로 잴 수 없듯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가치의 잣대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물질의 평안은 결코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배가 고픔에도 물질에 초연하라는 것은아니다. 물론 물질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넘친다고 꼭 행복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흔한 말로 조금 더 편할 뿐이다. 아니, 어쩌면 더 불편할 수도 있다. 넘치게 갖기를 원하는 것은 즉, 욕심이니까 말이다. 욕심에는 만족이 없는 법이다. 아무리 귀한 것도 너무 많으면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며, 아무리 객관적으로 가치 있게 평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쓰임새에 따라 그 가치가 재평가 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가끔 필자는 가까운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되지?” “밥만 먹여주면 되지?” 하고 말을 하고 나서 서로 마주보고 웃곤 한다. 더 가치있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은 단적으로 결론을 지을 만큼 그리 순진하고 단조로운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종합적이고 복잡다단한, 마치 실핏줄처럼 세밀하고 신비한 그물망으로 짜여져 있는 회로를 하나씩 이어나가는 고단한 작업이 바로 삶의 여정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 진정으로 기쁘고 환희에 찬 축복이라 여기면서 주어진 나날들을 감사와 겸손으로 메꾸어가는 작업, 씨줄과 날줄을 기묘하게 엮어나가는 그물코 작업과정처럼, 우리는 오늘 하루도 조심 조심 한 걸음씩 내딛는다. 기왕지사 살아있는 목숨, 활기찬 소리를 울리는 우리의 심장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진력을 기울인다. 그렇게 오늘이 가면 다시 내일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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