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림삼의 초대시 **
사는 게 뭔지 -
- 한율이엄마 訃音소식으로 황망한 아침결이다. 불과 몇 달전, 방사선치료를 시작한다는 풍문이더니, 이리도 급히 진행되어 졸지에 유명을 달리할 줄이야 미처 예측조차 못하던 터수다. 喪報를 대할 적마다 처음인 양 먹먹하고 안타깝기는 늘상 비슷비슷한 심사건만, 그 중에서도 특히 천수를 다하지 못한 죽음 앞에 서면 유독 참담할 따름이다. 이제 세상나이 설흔 좀 지났는 걸, 겨우 돌잡이 어린아이를 두고 차마 억울하여 어찌 눈을 감았을거나? 남겨진 이들에게 어려운 숙제를, 막중한 책임을 잔뜩 맡기우고 그니는 과연 갔구나. 먼저 가버렸구나. -
신선한 충격 앞에 선 세상이란 놈 차라리 잠잠해, 딱 그 만큼의 세월 훌쩍 흐르고 세상이 나만큼 내가 세상만큼 세월의 매듭에 목숨 매단 건 어쩌라고
어차피 누구든 언젠간 가는 그 길 그저 주어진 삶의 분량 가늠해 맘편케 그리 살면 되지 그만 살고싶다 해서도, 더좀 살고싶다 해서도, 늘이고 줄이지 못할 찬찬한 질투
어떻게 질투는 늙지도 않냐? 망상의 세월 반겁으로 흘렀거늘
세상이 날 특별하다고 여기는 만큼만 나도 세상을 특별하게 여겨줄 그 때 삶에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관계가 형성되지
살고 죽어지는 관계라는 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냐, 애당초 중요한 건 이런 애타는 목마름이 속에 담겨져있느냐 하는 거지,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이 겉으로 들려나느냐 하는 거지,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나 원 참! 사는 게 뭔지....
시의 창 -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칭얼대는 어린 자식을 바라보던 남겨진 아빠의 얼굴이 이제도 눈에 삼삼한데, 당시 겨우 걸음마를 하던 한율이가 올 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소식이다. 세월이 하마 이렇듯 무심히도 흘러버린 거다. 그런 거다. 갈 사람은 가도, 남겨진 사람들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거다. 그저 잊을 건 잊고, 기억할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렇게 사는 거다. 사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냥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거다. 열심히 열심히 숨을 쉬는 거다. 때로는 벅찬 숨 몰아쉬기도 하고, 혹은 여유로운 쉼의 시간을 가져보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한 평생 주어진 삶을 이어가는 이것이 우리네 삶의 본 얼굴이다.
오늘 고른 이 시는 시라기보다는 그저 넋두리다. 어찌보면 사람의 보잘 것 없는 무력함에 항거하는 신에 대한 반발인지도 모른다. 그냥 맥없는 푸념이며, 가없는 하소연이다. 답없는 의문이며, 끝없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한참 세월 흐른 이즈막에 읽으면서도 가슴 저리고, 답답함의 극치다. 누구라도 확실한 지표를 제시해줄 수 없는 막막한 이정표이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영원한 숙명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래서 이 시는 특별하다. 비단 필자의 시라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업수이 여겨서는 안 되는 숙제이며 제언이다.
정녕 산다는 게 뭔지... 탑 쌓아가는 인연들 속에서 우리가 가늠해야 할 여정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그 깊이를 한 마디로 함축시킬 수는 없더라도, 언젠가는 누구나 가야 할 길이 있으니 겁 내지도 말고, 피하려 하지도 말며, 차분하고 진솔한 마음가짐으로 늘 대비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운명의 손짓이다. 예컨대 우리가 태어난 것이 자의가 아니듯, 돌아가는 일도 자의는 아니겠지만 언젠가 조물주의 섭리가 있어 우리가 이승을 하직할 그 날,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이 미련이나 후회이기 보다는, 그래도 ‘한 평생 후련하게 잘 살아냈노라!’ 하는 호통과 너털웃음으로 막을 내릴 수 있도록 차근차근 대비하는, 그런 예쁜 삶의 하루를 오늘도 열어준 신에게 감사드린다.
고민하지 말자. 내일 벌어질 어떤 걱정거리를 미리 앞당겨 한숨 쉬지 말자. 우리에게 소중한 건 오늘이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오늘 해야 할 당면과제가 바로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오늘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오늘 우리가 이룩한 삶의 업적이 모이고 쌓여 일생의 이력서가 된다. 오늘 작심하고 계획한 일들이 평생의 공적이 되고 경력이 되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도 부단히 배우고 노력하며, 항상 시작의 자세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한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거다. 어떤 사람이 미워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가? 곰곰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좌지우지 당하는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말아야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첫 번째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쓸 데 없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든지, 자기 힘으로 안 되고, 인륜도 천륜도 아닌 것에 매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용서하면 안 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세상을 재미없어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세상을 통해 공부하라는 것이고, 우리는 다 공부하러 나온 학생이다. 그런데 학생이 학교 가는 것을 싫어하고, 공부를 재미없어 하면 안 될 것이다. 입버릇처럼 죽어야지, 사는 맛이 없다느니, 하면서 의욕이 없고 우울해 하면 안 된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것이 자기 자신인데 사랑하지 않고 팽개쳐 두는 것, 역시 용서하면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야 자신의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 때문에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절제를 잃고 산만해져 많은 세월과 기회를 허비하기 쉽다. 심지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아 생활의 원칙과 방향을 상실하기도 한다. 인간의 의지력은 인생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요소로서 인간 활동의 모든 상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돈이 많으면 절약을 잊어 재산을 탕진하게 되고, 지위가 높으면 절제를 몰라 권력을 잃게 되며, 큰 명성을 누리다보면 지조를 잃어 이름을 더럽히게 되기도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고난을 잘 이겨내야 무슨 일에서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신을 망치게 되고, 행운이 다가와도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그냥 밟고 지나가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살이라는 것이 늘 호사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치 날씨와도 같이 변화무쌍하다. 계획되어졌던 일이라면 일사불란하게 처리해 나갈 수 있지만, 때로 예기치 못했던 어려운 일들도 우리 삶엔 얼마든지 많다.
어려움이 없는 삶에는 감사함이 없다. 우리 삶에 질병과도 같은 어려움이 없다면 건강에 대해 상대적인 감사함을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삶에 저항력 또한 기를 수 없어, 또 다른 힘든 과정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고난은 더 큰 힘을 비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고난 앞에 도도할 이유,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오너라~ 부딪혀 주마!”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오늘이다.
어느 바쁜 아빠가 모처럼 휴일을 맞아 식구들의 간청에 마지못해 낚시를 갔다. 그날 밤 그는 일기장에 “오늘은 아이들과 노느라고 소중한 하루를 낭비하고 말았다.” 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일기장에 이런 글을 적었다. “오늘은 아빠와 함께 낚시를 했다. 내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필자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책을 읽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책 모서리를 접어놓았던 것처럼, 누군가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접어놓을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 사랑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주저함 없이 잔뜩 늘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항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의 완성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하다. 어떤 조건이나 세부사항을 열거할 필요도 없이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벌써 우리가 가진 모든 다른 것을 능가한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한 거다. 영원하고 또 영원한 거다. 우리가 사는 게 뭔지는 중요치 않다.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하루를 지내는 것, 그게 사는 것의 전부이면 된다. 그렇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건 바로 사랑을 하는 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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