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만든 세계(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2019)

차용국 | 기사입력 2021/02/17 [21:26]

글이 만든 세계(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2019)

차용국 | 입력 : 2021/02/17 [21:26]

 

▲ 글이 만든 세계(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2019)

 

글이 만든 세계(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2019)

 

 

태초에 말이 있었다. 말의 세계는 섬세하고 역동적이다. 입에서 입으로 말을 제대로 전하려면 총명한 기억력과 효율적인 암기 요령이 필요했다. 좋은 기억술에는 시가 적격이다. 리듬에 맞추어 노래하듯이 말을 전하면 의사전달의 효율성이 높다. 시가 수백만 년 동안 구연의 시대와 문자의 세계를 관통해서 흐르는 이유이다. 시는 문학의 원류이고, 인간은 지난한 진화를 통해 누구나 생래부터 시심을 간직하고 있다. 시는 인류의 공동 자산이지 애호가나 애서가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은 상징을 담은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고, 그 소리들을 이용해서 과거와 미래, 신들과 악마들의 이야기, 공동체에 공유된 과거와 공동의 운명을 부여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법을 터득한 이래로 줄곧 구두로 이야기를 전해왔다. 이야기들은 또한 듣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또 흔한 난관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면서 인간의 경험을 보존했다. 세계의 창조나 도시의 건립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들은 때로 이런 이야기들을 외워서 특별한 때에 암송하도록, 특별하게 지정한 시인에 의해서 노래로 불려졌다(56쪽). 이야기의 구연은 언제나 말하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입으로 전해지는 현재의 언어 속에서 생기를 띠며, 듣는 이에 맞추어 변형된다.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이 섞이거나 압축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 글로 쓰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시공간에 선이 그어진다. 과거와 현재라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길가메시에 관한 시가 구연되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문자가 발명되고 수백 년 뒤에 이 고도로 훈련받은 서기들 가운데 한 명이 실무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이야기들을 일련의 문자 부호들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57쪽). 우르크어를 사용하는 수메르 서기였을 것이다. 그 또는 그들에 의해서 <길가메시 서사시>가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한편 그리스 지역에서는 호메로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일리아스(Ilias)> 널리 구연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호메로스에 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다. 그가 시인이었는지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전사였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도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받아쓴 영리한 서기였을 수도 있다. 문자가 발명된 초기 수 세기 동안 문자의 활용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서기가 주도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우리가 거의 접근할 수 없는 시대와 우리가 타인의 마음속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로 나눈다. 문자가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과거의 유물과 유적은 우리 선조들의 외적 관습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반면, 문자로 고정되어 보존된 그들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그들 내면의 삶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독자에게 과거에 다가갈 기회를 주는 것은 문자가 미치는 가장 심대한 결과였다. 그러나 일단 문자로 포착되자, 과거는 세월을 버티며 지속되었다(75쪽). 문자의 사용은 곧 진정한 문학의 탄생을 의미했다. 문학은 4,000년 이상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삶을 빚어왔다. 문학은 인류의 삶을 때로는 웅장한 서사시로, 때로는 섬세한 서정시로 기록했다. 문학은 스토리가 글쓰기와 교차했을 때 비로소 진실한 가치를 발휘했다. 글이 만든 세상에서는 글이 곧 지배의 힘이었다.

  

그리스의 영웅 알렉산드로스의 머리맡에는 항상 세 가지 물건이 있었다. 단검, 상자, 그리고 <일리아스(Ilias)>다. 단검은 암살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마케도니아 출신인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을 잘 때에도 단검을 베개 아래에 깔고 잤다. 상자는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일리아스>는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주해를 단 판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쟁을 떠날 때에도 <일리아스>를 가져갔다. 당연히 동방 정복의 원정에도 이 책을 가져갔다. <일리아스>의 이야기는 대략 기원전 1,200년 청동기 시대, 알렉산드로스가 구사한 현대전 이전, 그리고 그리스 문자가 등장하기 이전의 세계가 배경이다(37쪽). 그는 이 책을 읽고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재연을 꿈꾸었다. 그는 자신을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동일시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은 글이 만든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리아스>는 모두가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텍스트, 그리스어와 그리스 알파벳을 확산시키는 주요 도구였다(43쪽).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동방의 국가들은 그리스의 알파벳 문자의 용이성의 유혹에 빠졌고, 그것을 자국의 문자로 채택했다. 오래된 문자인 수메르 쐐기문자나 이집트 신성문자는 그리스 알파벳에 밀려났다. 알파벳이 지배하는 세계가 만들어졌다. 결국 문자도 정치와 권력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기도 하고, 사멸하기도 한다. 글이 글을 지배하는 것이 글이 만든 세계다. 

 

글의 세계는 기술 발전에 영향을 받는다. 인쇄술과 같이 직접적인 기술은 더욱 그렇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글의 세계에 큰 혁신을 일으켰다. 구텐베르크 덕분에 더 많은 <성서>들이 인쇄되었고, 가격은 계속 떨어졌으며, 판형도 점차 줄어들어 사제들과 수도사들은 흔히 더 작은 팔절판이나 십이절판, 거의 포켓북 크기로 정마다 자신의 <성서>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219쪽). 사제와 수도사로부터 전해 듣는 <성서>에서 직접 해독하는 <성서>로 변해갔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인쇄기가 <성서>와 면죄부를 대량 복사하는 수단 이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루터는 인쇄기가 제도적 권력은 없지만 대중의 정서를 등에 업은 자신과 같은 작가들에게 어떤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의분을 표현하는 재능을 발견했다. 때때로 그는 언뜻 보면 순해빠진 질문들을 던졌다. 또 어떤 때에는 교황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언제나 보통사람들의 언어로 간결하고, 예리한 문장을 썼다. 그의 글은 인쇄기에 안성맞춤이었다(217쪽). 기술의 발전은 문해력의 확산과 글쓰기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루터는 그 비밀을 정확히 깨달았고 적응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서명자이며, 미국 최초의 연방 우정국장이기도 했던 프랭클린은 인쇄술을 언론과 결합하여 대중적인 글의 세계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프랭클린의 인생이 인쇄의 모든 측면과 워낙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삶을 인쇄를 통해서, 심지어 인쇄와 같은 것으로 바라보았다(293쪽). 그는 발전하는 인쇄술을 신문에 접목하여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멋진 신세계를 만드는데 헌신했다. 우리는 그의 소망을 존중하여 무엇보다도 그를 독립을 위한 투쟁에 인쇄의 힘을 가져온 사람으로 기억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가 자처하기 좋아한 대로 일개 공화주의자 인쇄업자를 넘어서, 그는 문필공화국의 둘도 없는 인쇄업자였다(294쪽)는 평가는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미국 독립에 인쇄술의 발전과 신문의 공급이 한 몫 충분히 거들었다. 미국 언론의 뿌리는 이렇게 심어졌고, 그 줄기와 잎이 세계를 항해 퍼져나갔다. 인쇄의 힘이 곧 글의 힘이었다.

 

글은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역시 그 가치는 문학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문학은 수많은 장르로 발전을 거듭했지만, 글에 딱 맞는 언어와 형식을 연결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옛것도 문학의 훌륭한 콘텐츠가 되기도 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내용처럼 출판의 형태는 옛것과 새것의 기묘한 혼합(406쪽)을 보여주기도 한다. 글의 세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끊임없이 이어진 상상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좀처럼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격동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제 인터넷과 디지털이 주역으로 등장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글은 또 어떤 세계를 펼쳐 보일까? 아마존의 서비스와 오늘날 제공되는 다른 신기술들의 궁극적 수혜자는 누구일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롤링 같은 작가인가? 인터넷 플랫폼, 아니면 출판사? 그리고 어떤 유형의 이야기들이 이 새로운 환경에서 번창할 것인가?(407쪽). 활자와 인쇄의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로 변해가는 조류에 편승하여 글도 디지털 언어로 변해갈 것이다. 문학도 디지털과 결합한 새로운 장르가 부상할 것이다.

 

말도 변하고 글도 변하는 것처럼 문학도 변한다. 하지만 말과 글과 문학이 추구하는 본연의 기능과 가치는 결코 줄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적응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발화를 시공간으로 깊숙이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416쪽). 어느 시대나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생각과 이야기가 있고,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표현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세계를 거쳐 왔다. 구연에서 점토로, 종이와 인쇄술을 거쳐 온 지난한 글이 만든 세상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듭 변할 뿐이다.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사용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는 번역되고, 전사되고, 코드 변환될 만큼 계속해서 우리에게 유의미해야 하고 세월에 걸쳐 지속되도록 세대마다 읽혀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이 문학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우리는 대폭발 직전에 서 있다. 글로 만들어진 세계는 다시금 변화를 앞두고 있다(417쪽). 디지털 문명기에도 상상과 창조의 영역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문학적 가치 또한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관심은 어떤 내용으로 어떤 콘텐츠를 입혀 생존할 것인가? 

 

마틴 푸크너는 이 책에서 글이 만든 세상을 네 단계로 펼쳐 보여주었다. 첫 단계는 소수의 서기 집단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제2단계에서 서기들은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카리스마적인 교사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제3단계에서는 글쓰기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혁신들에 의해서 뒷받침되어 개별적인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제4단계에서 종이와 인쇄술의 광범위한 활용은 신문과 대형 전단지와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이나 <공산당 선언> 같은 새로운 텍스트들을 통해서 대량생산과 대중 문자해득의 시대를 열었다(20쪽). 그는 주장의 논거로 글이 형성해온 인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16개의 근본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이 텍스트들을 일종의 스냅숏 방식으로 살펴보고 묘사한다. 사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영화나 동영상에서 인물이나 사건을 순간적으로 찍어 연결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각각 별개의 사건이 한줄기 주제로 이어지는 맥락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이 텍스트를 통해 펼쳐 보이는 '글이 만든 세계'란 결국 '문학이 만든 세상'이다.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갈 세상이다.

차용국(서평 쓰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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