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산 편지 668. 꽝?
2층 베란다 천장에 지어 놓은 말벌집.
큰 맘을 먹고 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우주복 같은 보호장비를 구해 착용하고
고무장갑를 끼고 김장봉투를 들었습니다.
곧바로 술을 담아야 할지도 몰라
큰 유리병에 담금술도 사다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녀석들이 말 그대로 벌떼로 반격할지 몰라
조심조심 칼로 도려냈습니다.
그런데 웬걸?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집이 너무 가볍고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통째로 떼어내 봉투 안에 넣었는데도
녀석들은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조심조심 내려와 찬찬히 살펴보니
저 사진처럼 '꽝'이었습니다.
녀석들은 어디론가 다 떠나가고
꿀도 남아 있지 않은 빈 집이었습니다.
저것을 따기 위해 완전무장을 했다니,
저것을 따기 위해 그토록 마음을 졸였다니,
너무나 한심한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렵니다.
꿀은 얻지 못했어도 경험 하나는 얻었으니까요.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맞게 되면
이번처럼 허둥대며 덤비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어렵게 준비하고 실행한 것을
아무 의미 없는 일로 만들기는 싫으니까요.
그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