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林森의 招待詩 **
- 론지노의 창으로 찌른 달 -
후미진 골골마다 몰아쉬는 음습 삐죽삐죽 솟은 쇠창살엔 천년을 이어온 울부짖음, 딱 사랑받은 만큼만 사랑하면서 살아온 숨자락은 적이 인색하여도 핏빛은 여전히 붉어 마뜩해하다가
어처구니 홀로이 머문 피안으로 길을 내 진즉 멀리로 떠나간 론지노의 마즈막 비상창, 설움들 죄다 버무리고는 열대야 비추는 가증스런 낯짝인 양 지붕엔 하이얀 달 곧추섰었지
그리움 깊어갈수록 얼추얼추 헤아릴 길 막연해 그저 깊어가는 바다 속 닮아 감성의 여울 깃들 부활 기둘리더니, 얼마나 큼직한 분노 용암으로 품어 이제껏 살아온 겐지
달빛 부서지는 허공으로 머줍게 실어보낸 바람 그리고 세월, 달막달막 입술 열어 딴에는 개똥철학 콩팔칠팔 읊조리곤 뜬금없이 배시시 입가 매어달려 서글퍼서 차마 상큼한 볼가심
조물주 원망하던 살리에르 질투가 차라리 처절한 몸짓되어 채곡채곡 뇌세포에 그려지는데, 찰칵! 이미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멈춰버린 시간 가운데 한 장 자기공명으로 추억될 뿐
저 하이얀 달은 마음자리 한 가운데 콕 박히어서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 탓하며 밤 이슥해 시퍼런 궁창, 이내 색바랜 새벽바다가 되도록 속절없이 그 정신과병동만 쓰다듬었지 론지노의 그 창으로 하릴없이 달만 찌르면서
- 시의 창 -
예전 MBC의 인기 프로였던 ‘서프라이즈’에 자주 등장하던 주제 중 ‘롱기누스의 창’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성창(聖槍, 라틴어: Sainte Lance)’을 의미하는 명칭인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한 병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는데, 거기 예수의 피가 묻었다고 여겨지는 창이다. 기독교의 상징적인 성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서 19장 34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에선 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집필 당시 ‘가현설’ 논란이 있자 예수가 죽었음을 확실히 하고자 집어넣은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중에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병사의 이름이 ‘론지노’라고 알려지면서 ‘론지노의 창(라틴어: lance de Longin)’ 또는 ‘운명의 창’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이 창은 ‘히틀러’가 소유한 적이 있다고 하여 더 유명해진 유물이다. 실제 이 창이 ‘로마 시대’, 그것도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그 창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이 롱기누스의 창을 소유한 자는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참으로 우습고도 단순하다. 하나님의 아들을 찌른 창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사실은 그 창으로 찔러 예수가 죽은 것도 아니다. 이미 구원 사역을 완성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하고 숨을 거둔 후에 그 죽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로마 군사 하나가 예수의 옆구리를 그 창으로 찌른 것 뿐이다. 그 찌른 몸의 흔적에서 나온 것은 ‘물과 피’였다. 여기서 물과 피라는 것은 단순히 몸 속에 있는 생리적 물질로서의 물과 피가 아니다.
여자가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할 적에 나오는 것이 바로 물과 피이다. 즉 물과 피는 생명의 출산을 의미한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한가? 성서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나온 그 물과 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교회가 아니라 우주적 교회를 의미한다. ‘사도 요한’이 이 기록을 기록한 이유는 바로 ‘아담’이 깊이 잠든 후에(깊이 잠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올 둘째 아담, 곧 예수의 죽음을 암시한다) 그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즉, 예수의 옆구리가 찔리며 나온 것이 결과적으로 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지듯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존재가 바로 ‘하와’(흔히 ‘이브’라고 하는)인데 하와는 아담의 신부가 된다. 이처럼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것이 바로 ‘예수의 교회’라는 말이다. 예수의 교회는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나왔는데, 그 희생을 증명해주는 물질이 바로 물과 피라는 것이다. 한 편, ‘아더 왕 이야기’에 묘사되는 예수의 성스러운 창은 그 기원이 다양하며 많은 의미를 감춘 수수께끼 투성이의 무기다.
이 창에 관한 이야기는 12세기 ‘프랑스’의 시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Chrétien de Troyes)’가 쓴 ‘성배 이야기(Le Conte du Graal)’가 그 줄거리를 대체로 결정했고, 그 뒤 ‘독일’인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가 쓴 ‘파르치발(Parzival)’, 나아가 15세기 ‘영국’의 ‘토머스 맬러리’가 정리한 ‘아더 왕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기원은 ‘켈트의 민화’라는 설도 있고 성서라는 설도 있으나, 이들 모두 명확한 기원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오늘은 시의 창을 이용해서 성경 속의 소재에 집중하다보니 마치 전문서적인 양, 역사와 신화의 범주를 넘나들면서 제법 심오한 전개로 이어졌다. 어울리지 않게 골치 아픈 사념이 너무 길어진 듯 하다. 이 이상 파고드는 건 문외한의 치기일테니 중단하기로 한다. 혹여 독자분들 중에 이 롱기누스의 창에 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관련서적이 다양하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우리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낱말들 중 거꾸로 읽으면 뜻이 완전 달라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면 낱말을 거꾸로 읽으면서 또 세상의 이치를 배우게도 된다. ‘성실(誠實)’하지 않으면 ‘실성(失性)’하고, ‘지금’ 하지 않으면 ‘금지(禁止)’되며, ‘실상(實狀)’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상실(喪失)’의 아픔을 겪을 수 있다. ‘체육(體育)’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육체(肉體)’를 잃을 수 있으며, ‘관습(慣習)’을 타파하지 않으면 나쁜 ‘습관(習慣)’에 얽매여 살게 된다.
‘작가(作家)’로서의 기질을 보여주지 않으면 ‘가작(佳作)’도 탄생시킬 수 없으며, ‘일생(一生)’을 목숨 걸고 살지 않으면 ‘생일(生日)’조차 맞이할 수 없다. ‘세상(世上)’을 똑바로 살지 않으면 ‘상세(詳細)’하게 목표를 설정할 수 없으며, ‘사상(思想)’을 똑바로 세우지 않으면 조금일 망정 ‘상사(上司)’조차도 되지 못한다. ‘사고(思考)’하지 않으면 ‘고사(枯死)’당하고, ‘등대(燈臺)’를 찾는 노력을 포기하면 ‘대등(對等)’한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세상의 소음과 '단절(斷絶)'하지 않으면 인생이 ‘절단(絶斷)’날 수 있으며, ‘성품(性品)’을 곱게 가꾸지 않으면 ‘품성(品性)’마저 망가진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며,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된다. 그리고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된다.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말을 늘 나 자신에 가까이 두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삶에 균형을 맞추면 쓰러지지 않는다.
꿈을 꾸어도 달라질 게 없어도, 그래도 내일부터 다시 꿈을 꾸자. 웃음이 안 나온다고 해도, 그래도 내일부터 그냥 이유 없이 히죽 히죽 웃기로 하자. 힘들다고 술로 지우려 하지 말고, 아프다고 세상과 작별할 생각 말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위기가 닥쳤다고 짜증 내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하자. 궂은 일은 빨리 잊어버리고, 좋은 일은 자꾸 자꾸 끄집어내어 길고 복잡하게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고 힘을 내자. 죽을 힘을 다해서 부딪처보자. 두렵지만 이겨내자.
인생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미, 정말로 힘들고 어려워서 죽을 것 같던 세월도 너끈히 견뎌왔잖은가? 우리들 각자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론지노의 창’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누군가를 찔러 피 흘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찔러 아파할 것인가? 아니다. 그 보다는 성스러운 이 창을 영원한 신화의 창으로 승화시키고, 마음 속의 성스러운 성물로 간직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달성한 우리 삶의 목표에 ‘론지노의 창’을 ‘보물 1호’로 영원히 자리매김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자. 그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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