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林森의 招待詩 -
같은 시공(時空) 다른 시점(時點), 속절없이
몇 남지 않은 새벽별무리 속절없이 풀풀 가루비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칠흑으로 어둔 숲 위 어느새 모습 드러낸 달빛만이 무심히도 아스라이 섧구나
입술 즈려물고 숨 죽인 바람이 구름 몰아와 달 가리기는 항차 예전에 글렀거늘, 괴괴한 적막 사이에 삿된 목소리로 별안간 달려들어 거뭇한 어둠의 고즈넉 깨뜨리겠다고?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니, 눈물 한 방울 물컹 눈꼬리에서 흘러내릴 제 연리지로 이 땅에 태어난 애환 울멍줄멍한 속내로 감추고 앙앙불락 창자만 끓일 따름이노니
출렁이는 강물은 밤이든 낮이든 상관없이 어차피 물길 따라 흐를 테지, 강변 우거진 버들의 우람한 어둠그늘 갈대 흐드러진 숲으로 변해도 강은 그저 흐를 뿐이지
마음 깊은 데의 배 한 척도 처연한 물길 흐름 따라 출렁출렁 그리 흘러갈 테고, 포말 뒷전으로 밀어낸 말소리 죄다 묻어버리면서 새벽 가는 어둠으로, 어둠속으로
- 시(詩)의 창(窓) -
가만히 보면 세상사가 다 그렇다. 어차피 단순하고 가벼운 일상이란 존재치 않는다. 사람 사는 속내가 제각각 천차만별이라서 확연한 공식이나 명쾌한 해답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누구나가 힘겹고 버거운 삶 보다는, 그저 천편일률적일 망정 어지럽지 않고 마음 편한 여정이기를 동경하고 탐한다. 남에게는 흔한 이별이나 아픔도, 내게는 절대 없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애면글면하고, 남들은 비록 주구장창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구렁텅이도, 나만은 피해서 달아날 수 있으리라는 헛된 소망으로 애끓는다.
그러다가 이내, 본인의 탐구가 애시당초 될 성 부른 염원은 아니었다는 진실의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절망도 하고 낙심도 하다가, 다시 또 힘을 짜내서 한 걸음씩 내딛는 고단한 삶을 어쩔 수 없이 영위해 가는 게, 무릇 삶이라는 해괴망칙한 미로의 고정 레퍼토리인 것이다. 속절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네 삶의 끈은 그렇게 끝도 없이 한도 없이 이어진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기에, 오늘과는 또 다르게 펼쳐지는 내일이기에, 내남할 것 없이 새롭게 각오라도 다지면서 고단한 하루를 산다.
예컨대 진리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그 모습이 바뀐다거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한 번 각인된 정의는 누구에게나 정의로 작용할테고, 일단 부정이나 패망으로 인식된 사실은 영원히 어둡고 음습한 그늘이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판에 박은 이 정의의 얼굴을 때로는 부정도 하고, 거부도 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또한 그런 시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각종 가설과 도전을 명제로 설정해놓고, 오늘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딴은 열심히 살아간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속에서 어떤 실체가 튀어나올 지는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성공과 보람의 상급이 주어질지, 아니면 실패와 추락의 형벌이 가해질지 모르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뚜껑을 연다. 저마다 흥부의 대박을 기원하면서 온 힘을 기울여 박을 탄다.
자기의 생각이 진실이며, 자신의 선택이 정의일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에 의미를 두고, 미래의 명운에 다걸기를 하면서. 새 날이라고 한들 별다를 바 없이 꾀죄죄한 일상이니 볕이 찾아들 리도 없건만, 새 하루가 밝았다고 해봤자 별쭝난 행운이 깃들 리도 없건만, 그래도 오늘만은, 오늘만큼은, 하면서 하릴없는 욕심으로 쳇바퀴같은 하루를 시작한다. 그게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삶, 즉 우리네의 인생사인 것이다.
험준한 산을 넘는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산을 넘으면서 힘이 들고 숨이 차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준비했던 거래를 성공시키고 큰 돈을 벌어서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날씨가 점점 흐려지면서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눈보라까지 몰아쳤다. 삽시간에 눈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남자가 작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하늘이 도운 행운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눈보라 속에서 온몸이 흠뻑 젖어 그대로 있으면 추위에 동사할 것이 뻔했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모은 남자는 불을 붙이려고 노력했지만, 불이 붙지 않았다. 불쏘시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남자는 품속에서 자신이 그동안 고생해서 모은 돈다발을 꺼내 주저 없이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덕분에 따뜻한 모닥불을 만들 수 있었고, 무사히 아침까지 버틸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밤새 심하게 불었던 눈보라는 그쳤고, 산에서 고립된 사람을 찾던 구조대는 모닥불의 연기를 보고 남자를 구조할 수 있었다. 남자는 가지고 있던 돈을 불에 태웠지만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내 생명과 미래를,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었으니 나에게 이보다 더 큰 이득은 없구나.’ 큰 깨달음을 얻은 남자는 더욱 더 노력을 해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인생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자신의 꿈으로 설정하고,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를 성공의 척도로 삼는다. 또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듯, 물질 또한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어느 것 하나 내 것은 없다. 잠시 살아있는 동안 내게 주어진 것을 보관하고 지키고 있을 뿐이다. 매일 아침 우리 앞에 돈을 벌어야 할 24시간이 아닌, 살아야 할 24시간이 펼쳐진다. 달아나고 싶은 유혹에 지지 말고, 지금을 생생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투자할 것은 돈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은 문화 생활을 위한 비용을 제일 먼저 줄인다고 한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돈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에는 돈과 현실 외에 우리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욱 중시하는 마음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음의 진정한 맛을 되살려준다. 굳이 문학이나 예술 감상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고, 좋아서 빠져드는 데가 있어야 한다. 심취하고 빠져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실은 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 것이다. 그저 무덤덤하게 사는 것이 점잖은 것 같지만 그런 태도는 무덤에 가까워지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미치게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좋다. 미칠 줄 아는 지혜가 진짜 삶의 지혜다. 이것이 오늘의 이 무료하면서도 정신없는 삶을 살아내는 지혜의 한 방법임을 명심하자. 어차피 우리 삶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줄거리대로 우리가 다시 살아지게 된다.
평범한 리더는 말을 한다. 훌륭한 리더는 설명을 한다. 뛰어난 리더는 직접 보여준다. 위대한 리더는 감동을 준다. 감동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많은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과연 누구에겐가 감동을 주는 사람인가? 심각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감동을 주기 위한 첫 단계로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이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허락한다.
화가 나면 화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감정은 때가 되면 떠나는, 쉴 새 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손님일 뿐이다. 감정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다. 일에 몰두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그 감정에서 쑥 빠져 나오게 된다. 또한 삶의 목적이 확실할 때, 감정에 빠질 확률이 줄어든다. 큰 정신이 있기에 자그마한 감정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의 주인이 되어 감정을 조절하고 지배할 때 삶의 참다운 주인이 될 수 있다. 같은 시공이거나 다른 시공이거나, 같은 시점이거나 다른 시점이거나, 속절없이 휘둘리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말고, 언제나 자기 삶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라는 긍지와 자존감을 갖고,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다지며, 하루 하루 알찬 알곡을 거두어들이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 매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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