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시간을 붙들고 싶었지만 지친 몸이 먼저 과거와 타협 하고 메마른 영혼은 마음을 내주지 않은 채 지나간 연민 속에 머물러 있네
오는 세월에 맞서는 건 현재를 버텨내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 버티는 꼭 그만큼 몸이 고달프다 비명 지르고
어느새 지친 사지 구석구석에 주름만 늘어 투정하는 육신은 무궤도로 달리는 거침없는 자전운동에 결국, 무릎을 내어 주다
- 저항 -
44. 저항
“네. 고맙습니다. 갑자기 공문을 보내드려서 놀랐을 텐데 요즘 중국 상황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저희 기획조정본부에서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급한 일정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급박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짧은 시간 안에 끝내서 가능하면 폐를 덜 끼치도록 노력할 테니 법인장님께서도 필요한 사항을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아 참, 여기 주재원들이나 간부들의 명단과 조직도는 이미 저희가 가지고 있으니 주지 않으셔도 되고 필요한 사항은 저희가 직접 담당자들에게 연락해서 협조받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법인장님께서는 저희의 협조 요청에 각 부서장이나 부서원들이 잘 응해주도록 얘기만 해놓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연수는 김기훈 상무가 가능한 이번 감사에 관여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후에 그와 다시 면담하기 위해서 일단은 이렇게라도 김기훈 상무의 간섭을 줄이려 했다
그런 연수의 의도를 모를리 없는 김상무가 호쾌하게 웃으며 짐짓 여유있는 척을 한다
“그럼요. 당연히 그건 제가 도와드려야지요. 그러실 줄 알고 이미 부서장들에게 그리 일러 놨습니다.”
생각보다 김상무는 노련했다
이미 부서장들을 소집해 감사에 대비하게 하고 주의사항들을 다 전달했다는 뜻이었다
김상무는 연수가 따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서랍에서 미리 준비한 협력업체 현황자료를 나눠주고는 간단하게 화성전기 중국법인 현황에 대하여 설명을 하겠다며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협력업체 부서장들이 수감에 불리한 파일과 자료들을 치우고 삭제할 시간을 충분히 벌기 위해 티타임과 현황소개를 빙자하여 최대한 늦출 수 있는 만큼 시간을 지체시킨 다음에야, 김상무는 연수와 박수현 차장을 데리고 1층의 비어있는 한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은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끝방이었고 거기에는 커피포트와 일회용 믹스커피 및 녹차 등이 몇 개 올려져 있는 작은 테이블 한 개가 회의실 입구 쪽에 놓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타원형의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을 연결해 쓸 수 있는 전원 케이블과 인터넷 잭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연수가 미리 협력업체에 보낸 협조 요청 사항은 맞추어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감사를 방해하고 감사팀의 동선을 살펴보겠다는 뜻이 담기어져 있는 것임을 연수는 단박에 눈치챘다
연수는 이를 짐짓 모르는 척하며, 김상무에게 감사를 표하고 회의실 문밖으로 김상무를 배웅하러 따라 나왔는데 이때 마침 방동혁 부장이 건물 입구를 막 들어서며 연수와 눈이 마주쳤다
방동혁 부장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혹여 방부장을 구매부 현장 사무실로 보내 현장의 구매일지와 재고 대장을 저들이 치우기 전에, 먼저 확보하려던 전략이 차질을 빚을까 봐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던 연수는 짧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방부장에게 손짓을 해 그들이 있는 쪽으로 오게 해서 김기훈 상무에게 인사를 하도록 했다
“이쪽은 우리 특별감사팀 일행 중의 한 명인 방동혁 부장이라고 합니다. 이곳의 물류 동선이나 레이아웃, 부품 재고 등을 먼저 살펴보려고 공장동을 둘러보고 이제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김기훈 상무는 방동혁 부장이 혼자서 공장동을 먼저 둘러보고 왔다는 말이 연수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조금 전까지의 여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황하였던지 방부장과 악수하는 것도 잊은 채 연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서둘러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그 후로 특별감사는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연수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전날 일행들과 짜놓은 전략대로 협력업체 구매부장을 먼저 불러 날짜별로 작성된 품목별 구매리스트와 입고 및 출고 대장, 재고 대장을 확보했고 이로써 방동혁 부장이 현장에서 확보한 대장들과 대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현장에서 확보한 대장과 협력업체 구매부장이 공식적으로 건네준 대장은 서로 차이가 났다
구매 품목별로 또는 일자별로 적게는 5%에서 많게는 20%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실제 대장과 차이를 보였는데 이는 김기훈 상무가 한국에서 데리고 온 주재원들은 콘트롤을 할 수가 있어도, 현장에서 일하는 중국 직원들에게 가짜 대장을 만들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괴리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이제 남은건 김기훈 상무가 허위로 만들어진 이중장부를 인정하느냐와 이중장부를 만들었다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실토하는 일만 남았다
연수와 기현팀 일행은 김기훈 상무와의 면담은 일단 보류하고, 회의실을 대강 정리한 다음 한 블럭 떨어진 두 번째 감사대상 협력업체로 발길을 향했다
註 : 본 시소설은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소재로 한 픽션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강원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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