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제국(1)

詩가 있는 詩소설

정완식 | 기사입력 2021/03/10 [13:49]

바람의 제국(1)

詩가 있는 詩소설

정완식 | 입력 : 2021/03/10 [13:49]

▲ 시소설, 바람의 제국



제1부, 바람이 멎다

 

연운항 비린 바닷 내음에 젖어 머물다

동풍에 떠밀린 기억 한 편이

서른 해를 훌쩍 넘어 불현듯 솟구쳐

늘 가슴 한 켠을 시리게 했던

지각 변동(智覺 變動)

 

꾸역꾸역 눌러 놓았던

귀로의 본능을 핑계삼아

탈출구를 찾아

피난처를 찾아

떠나는 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

 

패자의 바람이 머무는 곳

처연한 맥박이 숨을 죽이지만

한 줌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다시 돌아 돌아

제 자리에 서다

 

1, 예청공항

 

통유리에 갇힌 공항 창밖

희뿌연 초겨울 하늘에 길 잃은 노랑지빠귀

둥근 원 크게 그리며 선회하다

남녘 외딴섬에 고이 숨겨 둔

추억 한 조각 찾으러 길 나서고

 

전성기를 잃은 예청공항 로비는

손님보다 직원들 찾기가 쉬워

도착지 게이트에도

인포데스크도

티켓창구도 환전소도

한적한 기운만 감돈다

 

사내가 탄 기내도 다를 바 없었다

승객들 몇 몇은 이때 아니면

언제 이런 호사 누려보냐는 듯

좌우 팔걸이 온전히 제치고

세 자리 씩 넉넉히 차지하고 웃었다

 

사내의 일행이 이런 비행편이 유지될 수 있을까

걱정되는 듯 귓속말로 소근거리고

사내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 돌려

이제 막 착륙 준비차 예청 하늘을

길게 선회하는 비행기 창 밖을 본다

 

한눈에 공항청사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통유리 건물이 기내 창에 비친 수심 가득한

사내의 눈에 들어온다

 

그랬다

구름 사이 사이로 하늘에서 본 공항은

지방 소도시의 공항치곤 적지 않았다

 

예청시가 작은 군사용 지방공항을

국제공항으로 문 열고

이내 커다란 신청사를 신축하고

대대적인 개청식을 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뉴월 장미처럼

화려하게 피었다

게 눈 감추듯 쇠퇴한 건

고국의 여늬 대기업들도 마찬가지

 

중국에 큰 비전 품고

저돌적으로 뛰어들다

지금은 위기에 몰려 허둥대는

사내의 회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2, 호텔 가는 길

 

 

휘익 둘러 본 공항 로비

반기는 이 없는 텅 빈 진공관처럼

손님들 걱정거리 하나 안겨주고

깊은 숨 내쉰 사내가 로비를 뒤로 두고

일행의 초행길을 챙긴다

 

몇 안되는 손님들보다 열 배는 됨직한

택시가 상그런 봄 햇살 머금은

진녹의 플라타너스 옷을 입고

하얀 노란 투구모자를 쓰고

도로가에 사열을 했다

 

선두에서 사열 이끌던 택시기사

피던 담배연기로 허공에 안개꽃 그리다

이내 고개 떨구고

도로에 뒹구는 계절 지난 낙엽과

단물 빠진 채 버림받은 껌딱지를

용서할 수 없단 듯이 발로 밟아 대다

 

다가오는 사내와 일행을 보고

금새 어둡던 얼굴에 호롱불 켜고

사열 행진곡 대신 한국의 여자 아이돌

노래 틀어 놓고 손님에 예를 갖춘다

 

김포에서 매일 한 차례씩 정기 운항할 때도

비행편수 줄어 이젠 주 일회만 운행해도

이곳 택시기사들에게

한국 손님은 여전히 반가운 존재

 

고깃 비린내 가득한 연운항에서도

황포강변 불빛 휘황찬란한 상해에서도

네댓 시간을 자동차에 흙먼지 덮어쓰며 달려야

 

겨우 볼 수 있었던 촌도(村都)

 

예청믈 이렇게 제대로 된

도시 모양으로 갖출 수 있게 만들어 준 존재가

 

한국 기업인들임을 알고 있는 것

 

택시에 다가간 사내와 일행이

기사가 열어준 백트렁크에 캐리어 넣고

서류가방만 들고 뒷좌석에 나란히 몸을 싣는다

 

택시 안은 온통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

퀴퀴하고 오래된 인조가죽 냄새

거무죽죽 눌러 붙은 찌든 때,

이천 년대 중반 늦여름

사내가 이곳 기현자동차 중국법인에

첫 발 디뎠을 때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도 2, 3년전까지만 해도 사내가 이곳에 출장 올 때면

중국법인 의전용 기사와 승용차가

의례히 마중나오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림없는 일

그나마 시간에 좀 여유 있는 주재원이나 지인이

 

출장자를 마중나와 주면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주재원들 수가 절반으로 줄고

줄어든 주재원 숫자와 같은 비례로

늘어난 업무가 주재원들을 피폐하게 만들고 지치게 만들어

한국에서 출장오는 손님이라면 다들

질색하며 피하고

 

출장자에 대한 픽업은 커녕 그들과의 공식 회의도

 

가능하면 자리를 피하려

 

없던 핑계 만들어

 
회의 자리를 고사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본사에서 오는 출장자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작금의 이 곳 법인이 처한 교착상태 원인을 묻고

 

 

대책을 내놓으라 윽박지르기 일쑤여서

 

출장자와 잠시라도 같이 있을라치면 출장자들이 이것저것 캐묻고

관련 자료를 요청하는 바람에

자신들에 떨어지는 숙제 처리가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내의 이번 출장 목적이 이 곳 중국법인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점과 대책을 파악해 경영층에 보고하는 것이어서

 

여기 예청 공장에 주재하는 직원들이나

남경에 있는 판매법인 주재원들은

대놓고 사내를 피하려들 게 뻔했다

 

사내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왜냐하면 그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 중국법인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종종 그런 일을 직접 겪어 왔던 터

 

무슨 일 생기거나 사건 터지면

 

저승사자처럼 출장자들이 찾아오지만

사고나 문제에 대한 근본적 원인은 출장자들 역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해결책도 그들 스스로 가지고 있었지만

 

출장자들은 그것을 애써 숨기거나

모른 척하고 피상적인 것들에 매달려 주재원들을 괴롭히고

가뜩이나 이런저런 일들로 바쁜 주재원들

시간을 빼앗기만 할 뿐이었다

 

본사에서 오는 출장자들은

소위 기획 업무나 분석업무의

전문가들이라 자처하는 경우가 대부분

 

어떤 경우는 거창한 글로벌 컨설팅사의

경험 부족한 억대 연봉 전문가를 대동하고

주재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전문적인 언어나 분석 기법들로

주재원들의 기를 죽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알 수 없는 해법들을 던져주고

 

가버리면 그 뒤치닥거리는 또 여지없이 주재원들의 몫이 되었다

결국은 이래저래 주재원들만 더 고생인 셈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사내는 그래서 애초부터 이곳 주재원들의

 

대부분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자신의 출장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고

 

픽업 요청도 하지 않은 채

불편하고 냄새나는 택시를 집어타고

가기로 한 것이다

 

註 : 본 시소설은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소재로 한 픽션임을 알립니다.

     

난나야 21/03/11 [14:23] 수정 삭제  
  잘 읽었어요^^ 응원합니다
상상일상 21/03/11 [14:25] 수정 삭제  
  중국 출장 경험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앞으로 어떤 리얼 사건들이 벌어질지 기대됩니다.
이쁘니 21/03/12 [20:16]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제가 마치 그 시공간에 함께하는 느낌이었어요^^
인디고 21/03/16 [13:33] 수정 삭제  
  이런 연재글 잘 안보는데, 다음 화차가 기다려 지내요. 소설이 아니라 실화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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