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I.B.비숍 지음, 신복룡 역주, 2015) / 차용국

강명옥 | 기사입력 2020/11/12 [22:43]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I.B.비숍 지음, 신복룡 역주, 2015) / 차용국

강명옥 | 입력 : 2020/11/12 [22:43]

▲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 강원경제신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I.B.비숍 지음, 신복룡 역주, 2015) / 차용국

 

 

내가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 궁극적인 이유는 왕조의 흥망성쇠나 위인들의 업적과 사상 등과 같은 것을 알고자 함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심은 여러 생활 문화의 자료 연구물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여행기도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저자가 당시 시대의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기록한 여행기는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 문화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록이 역사와, 문화와, 가치를 형성합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이 쓴 이 책도 그러합니다.

 

그는 1894년 1월에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2월에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63세였습니다. 그는 1897년까지 극동에 머물면서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하여 장기 체류를 했습니다. 그는 뗏목을 타고 남한강을 답사하고, 노새를 타고 금강산을 관광했으며, 마적단의 습격을 무릅쓰고 시베리아의 한인촌을 탐사했으며, 뼈가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으면서 봉천을 여행했습니다. 조선의 이 시기는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그리고 을미사변을 겪은 한말 풍운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그의 육성 증언은 그 시대 연구의 중요한 일차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7쪽). 자, 이제 푸른 눈의 영국 여성과 함께 120여 년전의 조선으로 여행을 떠납시다.

 

1894년 2월에 부산에 도착한 비숍의 눈에 비친 조선 사람에 대한 첫인상은 어떠했을까? 비숍은 '조선 사람은 색다른 인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닮지 않았다. 오히려 양자보다 더 멋있어 보이며 일본인보다 체격이 더 좋다. 비록 그들의 평균 신장이 겨우 5피트 4.5인치이지만, 흰색 옷은 몸을 풍성하게 보이게 하고, 언제나 쓰고 있는 높은 왕관 장식의 모자는 키를 더 커 보이게 만든다. 사람들은 겨울옷을 입고 있는데, 소매가 있는 흰 면의 길고 품이 큰 겉옷, 거대한 바지, 그리고 버선은 모두 솜으로 채워졌다. 그들은 검은 모피의 가장자리에 장식을 달고 검은 비단에 솜을 넣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36쪽)'고 말합니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겉모습은 일본과 중국에서 보지 못한 기괴한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조선인이 쓰고 다녔던 갓을 서양의 페티코트(crinoline) 모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페티코트는 19세기에 서양의 여자들이 치마를 부풀어 보이기 위해 밑에 받쳐 입던 말총 천의 속곳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비숍은 보고 느낀 것을 섬세하게 기록합니다.

 

비숍이 본 서울의 첫인상은 실망스럽고 불쾌합니다. 제물포에서 배편으로 마포 강나루에 도착한 비숍은 '마포는 불쾌하고, 좁고, 끈적끈적하고 거친 거리였다. 구부러진 좁은 길은 본토 상품의 판매를 위한 초라한 상점으로 가득 찼으며, 산더미 같은 나뭇가지를 나르는 황소가 거의 길을 메웠다. 그 혼잡한 군중 속에는 남성들만이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배회하고 있었다'고 기술합니다(46쪽). 그러면서 '모든 종류의 행렬은 '도로'를 따라 서울로 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도로라는 단어는 있어도 실제로 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45쪽)'라고 말합니다. 당시 서울의 도로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눈에 선합니다.

 

또한 '하수도에는 각 가정에서 버린 고체와 액체의 오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불결함과 악취 나는 하수도는 반나체 어린애들과 피부병이 오른 채 눈이 반쯤은 감긴 큰 개들의 놀이터가 있다(50쪽)'고 적었습니다. 당시 서울의 후진적 하수도 실태와 불결한 위생 환경에 방치되어 있는 어린이의 처지를 적나라 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897년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서울의 인구는 총 219,815명으로, 도성 안에 144,636명, 도성 밖에 75,189명이었습니다. 당시 인구와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와 비교해서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닌데도, 도로와 하수 시설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입니다.

 

비숍은 서울의 자연 환경과 생태에 관해서도 섬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비숍에 표현에 따르면 '서울의 계곡에는 나무가 많았으며, 숲에는 침엽수와 낙엽송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우산처럼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 숲이 있었다(80쪽)'고 합니다. 나비와 잠자리가 수없이 많았고, 맑은 녹갈색의 뱀도 많았다(81쪽)고 합니다. 호랑이와 표범, 노루와 사슴도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호랑이와 표범의 피해에 관해서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호랑이의 마을 습격과 인명 희생 소식을 계속 들으면서 믿게 되었다고 하면서 호랑이 사냥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호랑이 사냥꾼은 군부대처럼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군사 행동에 소집되기도 했다. 그들은 왕이 거동 할 때 긴 화승총을 메고 헐렁하게 푸른 유니폼을 입고 원추형의 테두리가 달린 모자를 쓰는 등 기묘한 모습을 보였다. 호랑이는 국왕의 깃발에 그려져 있으며 그 가죽은 높은 관직의 상징이었다. 표범 가죽은 보다 낮은 계급을 지칭했다. 중국인들은 호랑이의 뼈가 정력과 용기에 특효가 있다고 생각하여 높은 가격을 주고 사 갔다(82쪽)'고 합니다. 하지만 사냥꾼들이 가장 노리는 목표물은 사슴이라고 합니다. 한강 주변에는 3~4종의 사슴 사냥이 주류를 이루었고 큰 사슴의 뿔과 가죽은 40~60달러의 수준에서 거래(82쪽)'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의 자연 환경과 동물의 서식 및 포획과 거래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숍은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숍이 조선을 여행한 시기는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한 시기입니다. 비숍은 '동학도들의 세력은 한강 이남에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는데, 그들은 현재의 상태에 불만을 보였고 다소 개혁의 욕구를 보였다(87쪽)'고 하면서 '동학교도들은 타락한 관료들과 간신배들에 대항해서 봉기했고 국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다고는 하지만 전국에 나돌고 있는 그들의 포고문으로 미루어 판단하건대 조선의 어디엔가 총성이 고동치고 있다면 그것은 농민의 가슴속뿐이라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들의 봉기는 무절제하거나 헛된 유혈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며, 그들의 행위는 개혁에 국한되어 있었다(172쪽)'고 평가합니다.

 

비숍은 조선 사회의 부조리한 일면을 들추어 비판합니다. '많은 수의 비특권층 사람들이 무거운 조세를 부담하며 양반들에게 억압당하고 있으며, 양반은 그들의 노동을 대가 없이 이용함은 물론 도조라는 명목으로 무자비하게 수탈해 가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상인이나 농부에게 돈이 생겼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양반은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것은 사실상 조세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절하면, 그 사람은 부당한 죄목으로 투옥되어, 그나 그의 친척이 대납할 때까지 곤장을 맞거나 열악한 음식을 먹어 가며 그 돈이 나올 때까지 양반 집에 감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양반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돈을 꾸어 주었다고 억지를 쓰는 방법이다(106쪽)'라고 고발합니다. 당시 조선 사회의 썩은 일면일 수도 있지만, 폐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 특권층의 부도덕과 폭정이 만연했다는 증언일 수도 있습니다.

 

1894년 9월 17일, 청국과의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자신들의 세력을 침투시켜 침략의 토대를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 정부의 내정 개혁을 자유롭게 단행하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257쪽).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의 압력과 감독을 받으며 최고 입법기관인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경장을 시행했습니다.

 

비숍은 갑오경장의 개혁 실패에 대하여 '일본의 커다란 과실 중의 하나는 개혁 실행의 전술상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1894년 7월에 일본이 궁궐을 강점하고 국왕을 비롯한 왕비ㆍ대원군을 농락한 것은 비록 갑오개혁이 의심스러운 정치적 필요, 즉 조선 지배의 목적 하에 반봉건적인 근대화 개혁의 객관적 요구를 반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도 실제로 주권국 조선에게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감을 느끼도록 만든 과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과거 갑신정변의 모반자들을 무리하게 요직에 앉힌 것은 하나의 중대한 실수였다(260쪽)'고 비판합니다.

 

비숍이 본 조선은 미개하고 부패하고 혼란한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비숍은 조선에 대하여 애정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숍은 조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에서 '조선은 필연적으로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조선의 자원은 고갈된 것이 아니라 미개발 상태이다. 성공적 경작을 위한 조선의 능력은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423쪽)'고 전망합니다. 조선의 바다와 토양, 그리고 강건한 민족성 내에 온갖 자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당면한 가장 큰 문 문제는 수천 명의 건장한 남성들이 자신들보다 나은 형편에 있는 친구나 친척에 의존해 살아가는 관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계에는 어떠한 수치심도 없고 이를 비난하는 여론도 없다(424쪽)고 아쉬워합니다.

 

이와 같이 비숍은 당시 조선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연구한 모든 것을 이 책에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개인 취향의 여행기가 아니라, 당시 조선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할만한 1차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비숍도 단순한 여행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영국 최초의 왕립지리학회 여성회원이 될 정도로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눈에 들어온 조선의 풍경과 사회 문화 등에 관한 기록에는 그의 학문적 지식과 사고가 녹아있습니다.

 

사실 비숍은 처음에 몽골 인종의 중요한 특성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1차 방문에서 조선이란 나라에 흥미를 갖게 된 이후, 2차 방문 때부터는 이 책을 쓸 목적으로 여행을 한 것입니다. 어쩌면 당시 비숍이 미개한 조선을 수차 방문하게 된 것은 당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후대에 전해주기 위한 소명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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