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시론 (이승하 외 11인 공저, 2019) / 차용국

차용국 | 기사입력 2020/09/23 [23:39]

새로 쓴 시론 (이승하 외 11인 공저, 2019) / 차용국

차용국 | 입력 : 2020/09/23 [23:39]

▲ 새로 쓴 시론 (이승하 외 11인 공저, 2019)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 강원경제신문

 

새로 쓴 시론 (이승하 외 11인 공저, 2019)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시를 지으며, 몇 권의 시집을 냈지만, 누군가 '시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 있게 명쾌한 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시론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살펴보고도 여전히 나아진 게 없는 듯합니다. 시에 관한 개념과 정의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시를 짓고, 시집을 낸다는 것이 어쩌면 이율배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먼저 개념을 정의하고, 그 인식의 틀에서 논리를 풀어가는 방식에 익숙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 개념 인식체계는 결국 선험적 인식의 틀에 맞추어가는 방식이므로 체계적인 공부 방법에는 매우 효과적일 듯합니다.

 

하지만 창조가 필요한 분야에서도 유용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창작의 영역을 심각하게 제한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미 정해진 개념의 틀 속에서 시를 짓는다면 스테레오타입과 같은 시가 난무할 듯합니다. 시문학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문예사조가 있었지만, 시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시는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견하고 논의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를 짓는데 시론이나 창작론 등을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승하 시인은 시를 쓰고자 하면서 시문학사를 모르고 시론을 모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3). 우리는 흔히 '기본에 충실하자'는 말을 하는데 시를 쓰려면, 시창작법, 시문학사, 시론 책을 읽어야 한다(4)고 강조합니다. 나는 이승하 시인의 견해를 열렬히 지지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모국어와 다른 시인의 시는 물론, 다른 분야의 책과 경험을 가급적 많이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반드시 박학다식한 학자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표현할 수 있으며, 아는 만큼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는 만큼 느낄 수 있는 것은 불변일 듯합니다.

 

이승하 시인은 이 책 ''일상의 언어와 시적 언어''에서 시인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 의사소통을 위한 말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잔해 위에 새로운 말의 탑을 세우는 자, 그의 이름은 시인(9)이라고 합니다. <문학형태론>을 쓴 R. G. 몰튼은 시인을 '창조란 존재의 총계에 무엇인가를 새롭게 보태는 일인데, 새로 보태지는 것이 시이며, 이 일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13)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공자는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 마음속에 있으면 '()'라고 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면 '()'가 된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고상한 뜻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것이 동양의 시인관(16)이었습니다. 이런 시인관은 많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실제 시인은 유교적 도덕성과 인격적으로 고상한 삶을 살지도 않으며, 그런 존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시인인가? 우리나라처럼 소위 등단이란 것을 한 사람을 시인이라 하는가?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등단이란 것이 시 짓는 자격증도 아닐뿐만 아니라 등단의 수준과 기준도 정해진 게 없고, 부패와 패거리 문단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등단제도가 척박한 환경에서 우리 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적지 않지만, 시대적 소명을 다한 제도는 퇴장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이를 어기면 적폐를 키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시심이 있습니다. 시는 인류 진화의 산물입니다. 생물학적 불리함을 기꺼이 버리고 말을 선택한 우리 조상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시 발생의 기원을 노래였습니다. 원시종합예술에 있어 문학은 곧 시였고, 시는 노래의 요소와 이야기의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20). 이레 출판사의 고석 사장은 류시화 시인의 시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시는 읽을 때보다 들을 때 더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운 낭송이 가능한 것은 시인이 티베트, 인도 등을 여행하며 시상이 떠오르면 입으로 외우고 중얼거려 운율이 밴 문장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21). 요즘 시는 산문적이며, 설명적이고 해석적인 묘사 중점의 시들을 자주 보곤 합니다. 이러한 경향을 걱정하고 비판할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산문시든, 서정시든, 서사시든 운율이 없는 시는 시와 산문의 어느 지점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잡문일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요즘 SNS 사용이 확대되면서 수많은 시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시를 짓고 읽는 것은 마땅히 권장할 일입니다. 하지만 SNS에 유통되는 시를 읽으라고 주저 없이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이제 막 꺼낸 초벌구이 같은 시를 서슴없이 올리는 대담한 추진력이 존경스럽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시를 세상에 내놓으려면 수차의 퇴고를 거친 다음이어야 할 듯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승하 시인의 시의적절한 조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승하 시인은 시는 본질적으로 운문임을 다시금 느끼고, 낭송을 해보며 퇴고하도록 하자고 합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된장과 김치 등 발효 식품은 발효가 될 때까지 묵혀 두어야 합니다. 시도 초고를 묵혀 두었다 고치고 또 고쳐야 합니다. 고쳐서 개악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말입니다. 시 자체야 쉬울지언정 쓰는 과정이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내듯 해서야 되겠는가(21)?

 

시는 함축의 언어예술입니다. 지시어는 머리(이성)에 의존하지만 함축어는 마음(감각)에 호소합니다. 함축어를 제일 많이 쓰는 이는 역시 시인입니다. 언어와 사물이 1:1의 관계가 아니라 1:다의 관계를 시인은 지향합니다. 알 듯 모를 듯한 말, 행간에 숨은 뜻이 있는 말, 해석의 여지가 풍성한 말이 문학적인 말(언어)입니다(23). 시의 언어, 즉 시어는 축소지향의 언어입니다. 시인은 한 마디의 말에 여러 가지 뜻을 담고자 애를 쓰는(24) 이유입니다. 최초에 시를 짓는 것이 산고가 아니라 그것을 더는 함축할 수 없을 때까지 깎고 고치는 퇴고의 과정이 산고일 듯합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가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다 껴안고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가 없으면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고, 언어를 통한 인식이 없이는 사물과 현상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말이 있어야 모든 사물과 현상의 존재가 가능하며, 문학은 말에서 출발하여 말에서 끝난다(24)는 뜻입니다. 모든 말이 시어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말은 시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을 시어로 다듬어 시라는 언어예술로 탄생시키는 일이 시인의 몫입니다.

 

앞에서 나는 다독이 시창작에 기여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경험도 같은 의미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경험을 기억하고, 상상력도 이 터에서 싹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현승 시인은 ''경험과 상상력의 만남''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든 간접 경험한 것이든 모든 기억은 '기억의 형식'을 갖는다(26)고 합니다. 기억의 존재 방식(형식)은 곧 경험의 재현 형식이기도 하다(27)는 말입니다. 새롭고 도전적인 시들은 언제나 경험의 형식에 충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경험의 형식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30)고 합니다. 재현 방법을 통해서 경험의 내용을 성찰하는 것이 시의 방법론이며, 고백의 장르인 시를 통해서 맛볼 수 있는 각성과 반성일 것입니다(31)

 

이현승 시인은 보편적인 생각과 특수한 느낌을 결합하는 것이 상상력이듯 같음과 다름에 대한 명철한 분별력이 없으면 상상력은 발전할 수 없다(33)고 강조합니다. 시는 경험을 상상적으로 재현(재구성)합니다. 경험이 시를 통해서 전달하는 어떤 경험내용 일반을 말한다면, 상상이란 그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보다 형식적인 틀을 가리킵니다. 상상력이란 사실을 더욱 톺아보게 하는 돋보기 같은 것이요, 그렇게 전달되는 경험은 일종의 증강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38). 시와 문학에서는 직접 경험보다는 그것의 상상적 변용으로서 잠재성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개연성이란 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39). 파급력과 영향력을 가지지 않은 사실이 사실로서 가치를 가질 수 없듯이 우리가 경험과 상상을 재구성하고자 할 때에는 사실의 세계가 주는 중력과 상상력이 가져다주는 부력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40). 결국 좋은 시는 경험과 상상력이 조화롭게 재구성된 시라 하겠습니다.

 

현대 생활의 복잡하고 다양한 일상이 현대시에 투영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을 것입니다. 윤의섭 시인은 ''시에서의 일상성과 현대성''에서 시의 일상성이란 말 그대로 우리의 평범하고 실생활적인 삶의 모습이 시에 담겼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시의 일상성은 '일상'이 새로 만들어져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시에 '일상'을 끌어들이면서 확산되었다(41)는 점입니다. 시의 일상성은 삶의 도시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회, 정치, 사상 등과 관련된 거시 담론과 함께 산업화 이전의 농경 중심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연관, 자연의 순리, 자연에 대한 이상향 의식 등과 같은 거시 담론적인 의식이 도시 생활을 경험하면서는 매일매일 맞부딪치는 눈앞의 현실에 대해 세심하게 반응하는 미시 담론적인 의식으로 변화해 간 것(42)이 주요인 일 듯합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현대시를 일상의 세심한 관찰과 유의미한 함의를 찾아내고 시화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윤의섭 시인은 '현대성'은 전근대와 다르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갖는 현대적 의식, 현대적 세계관 등을 의미한다(49)고 말합니다. 시의 일상성과 관련하여 볼 때 '일상성'199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일상성은 '후기 현대성(post-modernity)'을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49). 자기 타자화나 의식의 사물화 양상은 인터넷 등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망 속에서 오히려 개인 정보망에 폐쇄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현대인의 독자적인 행동방식의 산물입니다. 자기 세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일상을 담아내고 있는 오늘날 시의 일상성은 현대인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51). 오늘날 시의 일상성은 일상에 대한 거리감이 점차 좁혀지면서 일상의 외부가 아닌 일상의 내부에서 일상을 세계 자체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외부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폐쇄성과 치유 대상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자족적이고 물성화되어 가는 현대인의 일상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오늘날 시의 현대성입니다. 21세기 시의 일상성과 현대성은 앞으로도 등강관계를 향해 병진할 것입니다(54). 현대 생활의 일상의 다양성과 확대 경향은 현대시의 다양성과 확대를 함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도구를 사용합니다. 시창작의 도구는 물론 언어입니다. 도구는 갈고 닦을수록 빛이 날 것입니다. 언어라는 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 상징, 이미지 등과 같은 기법이 그것입니다. 먼저 비유를 살펴봅니다. 장이지 시인은 ''시적 비유와 상징''에서 비유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으로 정의합니다. 비유는 시의 중심구조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비유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관념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시 읽기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보조관념이 단순히 원관념을 보조하기만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일 뿐입니다. 비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원관념 찾기 따위가 아니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접점이나 경계, 두 관념의 결합에서 발생하는 긴장이나 두 관념의 충돌에서 환기되는 여러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55)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이지 시인은 비유는 우선 시인에게 원관념이 중요한 의미를 띨 때 비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시안'이라고 불리는 것은 대개 시인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비유 쪽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때 원관념은 보조관념을 거느리게 됨으로써, 혹은 보조관념과 충돌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됩니다. 다음으로 비유는 일상어와는 구분되는 시적 자질이라는 점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일상적인 언어가 만드는 질서에 충격을 줌으로써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냅니다(58). 은유는 두 개 이상의 관념을 동일성의 관계로 결합하는 것이고, 환유는 연상에 의해 두 개 이상의 관념을 통합하는 것입니다(61). 보조관념으로 사용된 어휘들이 거느리고 있는 중층적인 의미망들이 지시적인 의미에 덧붙어 새로운 의미를 낳는 것입니다. 은유의 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61). 이것이 시가 은유의 미학이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환유는 인접성의 원리입니다. 인접성의 원리는 원관념을 인접해 있는 다른 보조관념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을 장소로, 내용물을 용기로, 사람을 소지품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 등을 환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접성에 근거를 둔 비유라고 알 수 있도록 단순하게 쓰이지는 않습니다. 환유는 연상의 비유라고 보는 것이 인접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보다는 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65). 환유에서 시적 기능은 연상적 원리를 연상관계에서 통합관계로 투사합니다. 어휘들을 통합하여 통사 구문을 만들 때, 연상 작용에 의해 통합이 지배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환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66). 지금까지 비유와 환유의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시창작의 실제에 있어서, 은유와 환유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시를 짓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개념들이 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생동감을 불러낼 수 있을 정도로 체화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장이지 시인은 상징이란 비감각적인 대상을 이미지로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상징의 기본 형태는 관념과 이미지의 결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관념과 이미지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68). 은유의 기본 형식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이항으로 되어 있는 데 대해, 상징의 그것은 이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념과 이미지의 일원론적 결합으로 되어 있다(68)고 하지만 양자의 구분은 쉽지 않습니다. 상징을 판별하는 몇 가지 조건은 첫째, 상징에서 관념과 이미지는 입체화되어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원관념이 생략되어 있어서 보조관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원관념 그 자체이기도 한 이미지입니다. 둘째, 상징은 감추면서 드러내는 암시성을 띤다는 점입니다. 필연적으로 상징은 다의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상징은 문맥성을 띤다는 점입니다. 비유보다 상징은 작품의 전체 문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69)는 것입니다.

 

장이지 시인은 상징은 시인의 개성과 독창성을 측정할 때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다만 이 상징은 확산의 폭이 좁으므로 독자들이 상징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도록 시적 문맥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는다든지 해석의 단서가 될 만한 장치를 함께 마련해 놓는다든지 하는 배려가 필요(70)할 것입니다. 대표적인 상징으로 대중적 상징과 원형 상징 등이 있습니다. 대중적 상징은 보편적 상징, 제도적 상징, 문화적 전통, 종족 문화적 상징 등을 포괄합니다(71). 원형 상징은 '원형'과 관련된 상징입니다. 원형이란 인류가 만들어온 역사와 문화에 수없이 되풀이된 이미지나 테마 등을 말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각인된 이미지의 패턴입니다(73). 상징은 분명히 우리의 지각 영역 안에 위치하는 어떤 상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식으로는 전부 파악할 수 없는 무의식에 그 뿌리가 닿아 있습니다(76). 우리의 상상력은 본래 상징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이룩한 상징체계의 한 부분(77)이기도 합니다.

 

시의 밋밋함에 생기를 불어넣는 기법으로 반어와 역설이 있습니다. 시어에 새로운 날을 세워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조동범 시인은 ''반어와 역설의 차이''에서 반어가 반대의 의미를 지닌 두 개의 대척점과 그것의 거리를 통해 의미를 재현하는 데 반해, 역설은 모순된 표현을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81)고 말합니다. 반어는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와 대조적인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이때 반어는 낯설기만 하여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모습으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을 유추할 수 있는 반대의 모습으로 위장합니다(82). 반어는 ''변장''의 뜻을 가리키는 희랍어 에이로네이아(eironeia)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반어는 변장과 위장 그리고 은폐의 기술을 통해 시의 의미를 전달(83)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조동범 시인은 역설(paradox)은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한 듯하지만, 표면적인 논리를 떠나 자세히 생각하면 근거가 확실하든가 진실한 진술 또는 정황(90)이라고 합니다. 또한 반어와 역설은 일반적인 어법으로 보여줄 수 없는 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이면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적 수단으로 적합하다(98)고 합니다. 반어와 역설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고, 시적 언술에 녹아들도록 한다면 생동감이 꿈틀거리는 역동적인 시를 창작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는 묘사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묘사는 시만의 특성은 아닙니다. 모든 문학과 글은 결국 묘사일 듯합니다. 시의 묘사는 이미지 만들기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장만호 시인은 ''현대시의 이미지와 시어의 감각''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미지는, '대상을 재현한 재현물로서의 이미지''재현물을 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인상'을 의미한다(99)고 말합니다. 문학에서 이미지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하여 그려지는 말의 그림'으로 정의(100)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되며 향수됩니다(101). 이미지는 감각하는 우리의 신체가 겪은 체험을 다시 감각과 관련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103)이라 하겠습니다. 감각과 지각은 우리가 세계와 교섭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표현 그 자체인 이미지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108). 이미지는 체험의 언어적 표현입니다. 체험은 감각을 통해 획득되므로 이미지는 감각을 재현하거나 구성함으로써 표출된다(111)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은 예술의 원천이며, 예술가가 작품을 구상하는 기본적인 힘입니다. 특히 시에서 상상력은 이미지를 구성하고 변형하며 조직해내는 능력으로 평가됩니다(111). 허무맹랑하거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떠올리는 '공상'과는 달리, 상상은 '현실구속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로부터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상을 위해서는 상상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상상은 이처럼 현실에 있는 어떤 것, 특히 감각을 통해 얻어진 대상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의식이며, 그것을 다시 이미지들로 구성하는 힘(112)이라 하겠습니다. 시의 이미지는 이처럼 감각과 상상이 동거하는 자리이며, 체험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이 맞닿는 자리입니다. 체험과 상상을 감각적 언어로 구체화 한 이미지(121)가 시라 하겠습니다.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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