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계간 사람들 > 인물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쓰지 않을 수 없어 써내려간 역사소설,<칠십일의 비밀> 저자 이성수
 
김철우 기자 기사입력  2018/10/21 [21:24]

[강원경제신문] 박현식 기자 =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항전지였던 대둔산을 무대로 동학농민군의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역사소설 <칠십일의 비밀>이 출간되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이병규 박사의 논문에서 시작된 본 소설은 수원문화재단에서 공모한 수원 문학 창작지원금 우수 수상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작가인 이성수 소설가를 만나 작품 이야기를 들었다

 

▲ <칠십일의 비밀> 저자 이성수 소설가     © 강원경제신문


 

1. 농민혁명군에 관해 설명을 부탁합니다

 

조선 후기는 60여 년간 진행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로 기강이 무너져 나라와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위정자들은 정권쟁탈에만 몰두할 뿐으로 국제정세나 민생을 도외시했다.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떨어뜨린 쇄국정책도 따지고 보면 정권쟁탈전의 산물이다. 사회 병리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덩달아 삼정(세금제도 : 전정, 군정, 환곡)은 기득권층의 사리사욕의 수단이 되고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며 신분을 사고파는 일까지 만연해지고 있었다. 또 외세의 강요로 이루어진 개항의 여파도 한몫을 하여 근간을 이루던 유학적 가치와 관념이 급속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폐해는 피지배계층인 몰락양반, 농민, 천민 등에게 돌아갔다. 정보의 접근이 취약하고 여건이 부족한 피지배층의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사라지기까지 했다. 점점 형편이 나빠져 심지어는 초근목피와 유리걸식의 처지로 내몰려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어디에도 피지배층이 기댈 곳은 없었다. 그들은 살아남으려고 민란을 일으켰다. 조선 팔도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때 동학이라는 신흥종교가 등장했다.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워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탈출구 없는 그들에게는 동학은 탈출구였다. 저마다 희망을 품고 모여들었다. 자신들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목청을 높였다. 동학농민혁명군이 되어 새 세상을 꿈꾸고 건설하러 나섰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탈 봉건과 반외세를 부르짖었다. 전라도 무장현 동음치면 당촌 마을 앞 강변(무장기포지)4,000여 명이 모여 창의포고문을 선포하고 자신들이 봉기한 뜻을 조정과 세상을 향해 밝혔다. 농민혁명군이 순식간에 10만여 명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환영 일색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되었던 10여개 월 동안 조선 팔도에서 약 300여만 명이 가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군이 지휘하는 관군과 일본군과 민보군의 연합부대에 의해 30~40여만 명이 희생되었다. 무장 창의선언문을 통해 밝힌 것처럼 농민혁명군의 봉기는 구국을 위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광복 이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동학농민혁명은 왜곡되고 폄훼되어 반란군으로 낙인찍혔다. 2004년에 제정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명예가 회복되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 극히 일부에 불과한 참여자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현실이다.

 

2. 소설 <칠십일의 비밀>이 나오기까지 과정을 소개해 주시지요.

 

<칠십일의 비밀>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다룬 저자의 두 번째 작품이다. 먼저 동학농민혁명과의 만남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저자의 고향은 무장기포지에서 약 5 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에서 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랐다. 하지만 무장기포지의 역사는 풍문으로도 들어 본적조차도 없다. 근래 들어 알게 된 역사다. 그렇기에 이전 작품인 <구수내와 개갑장터의 들꽃>을 집필할 당시, 혁명이라는 명칭에 의문을 품고 시작했다.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조명하여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이병규 박사가 제공해주었던 자료 덕분이다.

소설 출간 후, 감사 인사차 방문했던 자리였다. 자기 논문의 소설화를 권유하며 건네주었다. 그렇게 집필이 시작된 <칠십일의 비밀>이다. 사실 엉겁결의 약속이었으나 논문을 탐독하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숙제를 미뤄놓고 엉뚱한 일에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는 것만 같았다. 조급하고 불편했다. 이병규 박사의 논문이 소설의 바탕이다. 논문을 통해 영감을 얻었고 대부분의 스토리도 논문내용에서 찾았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우리 근대사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전환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건이다. 그런데도 소홀하게 취급된다. 무척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집필하는 내내 갈등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를테면 사명감으로 소설을 완성할 즈음이었다. 때마침 수원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형형색색 문화예술지원사업이 공고되었다. 치열한 공모경쟁을 거쳐 선정되었다. 그리고 수원 문학 창작지원금 우수 수상작품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자칫 탈고로 만족하고 말았을 뻔한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이 출간되어 독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어 더 뿌듯하고 기뻤다.

 

▲ KBS TV 오늘의 초대석 출연 당시     © 김철우 기자

 

3. 농민혁명군 당시의 시대상에 관해 설명을 부탁합니다

 

개항의 여파로 선진 문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정보에서 소외된 피지배층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는 일들이었다. 또 탐관오리의 학정과 가렴주구는 끝 간 데 없이 심해져 갔다. 민초들이 아우성쳤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듯 관료들의 가렴주구와 학정은 더 심해지기만 했다. 아무리 온당하게 호소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지막지한 무력으로 억누르기에 바빴다. 피지배층인 농민들에게는 참혹한 날들의 연속될 뿐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농민들은 살기 위해 민란을 일으켰다. 그래도 조정과 관리들은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기에 바빴다. 농민들은 동학의 우산 아래 모여들었다. 동학조직과 힘을 합쳤다. 전라도 무장에서 창의선언문을 선포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주장하며 죽창을 들었다. 하지만 조정은 개의치 않았다. 힘이 부치자 청군을 끌어들여 진압하려다 일본군의 무단개입을 초래했다.

나라는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위태로웠다. 농민혁명군은 개입의 명분을 제거하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죽창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침략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삼례에서 또다시 죽창을 들었다. 그동안 소극적이던 북접의 농민혁명군까지도 기꺼이 합세했다. 죽기를 각오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하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결국, 전라도 무장에서 시작된 농민혁명군은 10여 개월 만에 대둔산 최후항전을 끝으로 괴멸되고 말았다. 관군이 아닌 일본군의 총칼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신과 기상은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농민혁명군이 요구했던 폐정개혁 18개 조 대부분은 갑오개혁에 녹아들어 근대제도의 시원이 되었고, 그 정신은 제2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불리는 1899년의 영학당 사건으로, 항일의병 활동으로, 그리고 3.1 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촛불 혁명으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나라가 위태로워질 때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마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때마다, 그 정신은 어느 틈에 발현되어 질 것이다.

 

4. 칠십일의 비밀이 나오기까지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요즘 독자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등장으로 자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 출판시장은 아사 상태나 다름없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스마트 폰에 정신이 팔려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종이책의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더군다나 칠십일의 비밀은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별로 없다. 겨우 120여 년 전의 대사건이고 가장 중요한 근대역사인데도 국민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극히 일부분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런 현실이 아쉽고 힘들었다.

 

▲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최후 항전지 취재     © 김철우 기자

 

5. 소설가님은 대둔산 농민혁명과 어떻게 인연이 되셨는지요?

 

대둔산은 소설 <칠십일의 비밀>의 주 무대다. 전북완주와 충남 금산(당시에는 전라도)과 논산의 경계지점에 솟아있으며,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산이다. 특히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아픈 역사가 짙게 서려 있는 곳이기에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숙연해지는 곳이다.

대둔산 농민혁명군의 존재는 동학농민혁명 연구학자 논문 금산. 진산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전주 KBS TV 투데이 전북 제작진의 덕분으로 유적현장을 직접 살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대둔산 농민혁명군 최후 항전유적지는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천혜의 요새다.

당시 관군으로서 진압에 참여했던 소모사 문석봉의 기록대로 하늘을 나는 새나 드나들 수가 있을 곳이다. 기구 험로로 취재 도중 양쪽 다리 근육이 수축되어 고통스러웠을 만큼 접근이 어려운 곳이다. 발굴 주역으로 참여했던 안내자가 접근로를 잃고 헤맸던 은밀한 곳이다. 농민혁명군이 주둔했던 유적현장은 망루처럼 솟아 있는 세 봉우리가 한데 붙어있는 형상이다. 봉우리로 드나들던 서북쪽 능선으로 연결된 약 3m 높이 낭떠러지 부위를 제외하고는 천 길도 더 넘어 보이는 성벽형상의 봉우리다. 더군다나 봉우리 가장자리에 바위벽이 둘러 서 있어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그만인 곳이다.

그야말로 요새 중의 요새이다. 하지만 결코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농민혁명군은 그곳으로 올라갔다. 두 채의 가옥을 짓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깨진 기왓장과 구들장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 쌓인 눈을 녹여 마시며 버텨냈을 것이다. 엄동설한의 그곳에서 70여 일 동안이나 막강한 전력의 일본군이 지휘하는 연합부대(일본군, 관군, 보부상)에 맞서 싸웠다. 끝내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진압당했지만, 그들은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한 26명 전원이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했던 현장이다. 특히 김석순은 일본군에게 목숨을 내줄 수 없다며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150m 낭떠러지로 몸을 날렸다. 가슴이 먹먹하고 쓰라렸다. 선조들의 기개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저자는 대둔산에서 꽃이 되고 봄이 된 농민혁명군들의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들의 얘기를 엮어 내 허공을 향해서라도 외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 <칠십일의 비밀>이다.

 

▲ 홍재 백일장 대회에서     © 김철우 기자


6. 봉사인으로서 이성수 본인을 소개해 주세요.

 

저자는 지금도 글쓰기와 그다지 관련 없는 엔지니어링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엔지니어의 세상은 좁고 단순했다. 그렇기에 집필을 통해 넓고 복잡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때로는 눈에 들어오는 사회의 여러 병폐에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의 힘으로는 해결될 일들이 없다. 각 분야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이다.

하지만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일이기도 하다. 명예가 실종되어 나타난 것들이라서 명예가 자리를 되찾으면 가능한 일들이다. 특히 요즈음 자본의 가치가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 자본이란 본래 유불리에 따른다. 옳고 그름에 따르는 명예와 균형을 이뤄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자본에 명예가 종속된 상태에서는 사회병리 현상이 치유될 수는 없다. 명예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자본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명예의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그런 바람으로 글짓기 한다.

 

7.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인공지능기술이 못할 일이 없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감성과 감정을 갖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제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인간이 지닌 감성과 감정을 따라 잡지 못할 것이다.

4차 산업의 시대다. 융합의 시대이다. 각 분야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서로 만나고 있다. 예술과 과학기술이 만나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모두 상상력으로 가능한 일들이다. 인류역사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상상의 우열이 현실의 우열이 될 것이다. 이제 한 분야의 전문성만으로 해낼 일이 점점 없어질 것이다. 이질적 분야를 결합시키고 응용해 낼 능력이 필요하다.

요즘 전문가로 번역하는 expert가 과거에는 노예를 칭하는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맡은 일만 잘해내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인문학이 답이다. 소설을 통해 상상력 확장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10/21 [21:24]  최종편집: ⓒ 강원경제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주간베스트 TOP10